한국일보

자랑스런 우리 신앙 선조

2007-08-28 (화)
크게 작게
하명훈(재활의학전문의)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 선교사로 1601년 북경에 파견되어 중국에서의 선교는 그 지배층과 지식인을 먼저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중국의 문화와 종교를 공부하면서 서양의 과학서적과 천주학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명 황제는 물론 식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그 중에서 ‘천주실의’ ‘교우론’ 은 그가 저술한 책으로써 특히 전자는 중국 사대부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기 위해 유교적 사고의 바탕 위에 저술되었으며 불교, 도교의 이념, 중국의 고사 등을 인용하기도 했고 이는 후일 조선 천주학의 기본 교리가 되었다.

‘천주실의’의 내용을 간추리면 천지창조설, 영혼불멸설, 천당지옥설 그리고 성선설로 요약되며 ‘교우론’ 중에서 ‘친구는 제 2의 나’라는 글을 읽은 조선의 실학자 이수광이 서양인도 인간관계를 중히 여긴다는 것을 신기하게(서양 오랑캐는 야만인 정도로 알았음) 생각하여 긍정적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칠극’은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1571~1618)가 지은 책으로 신앙인이 지켜야 할 윤리적 덕목을 각 7개의 죄와 덕행을 다루고 있는데 죄란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욕을 말하며 덕행이란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그리고 인내를 포함하고 있다.후일 학자들은 이 서적들을 한글(언문)로 고쳐 당시 반상의 차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의 실학자 안정복(1712~1791)은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학을 비판하고 후일 성리학(주자학이라고도 칭하며 유교사상의 근본)과 충돌을 예견하기도 했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 치욕적인 항복으로 청은 조선과 형제관계에서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말기 명나라와는 이미 군신의 관계에 있는 처지라 두 임금을 섬겨야 하는 모순에 빠져들면서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 사이가 괴리되었으니 이는 성리학이 지배철학으로써 설득력이 약화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실학이 부상하였다.동시에 천주 앞에 만인평등의 천주학 전파의 토양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하였으리라.
정약용, 정약전, 이승훈 등 대부분 남인 출신의 실학자들이 천주학을 연구, 토론하였으며 1784년에는 공부를 위해 중국으로 간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느님의 복음이 처음으로 선포되는 해가 되었으며 이는 ‘천주실의’가 조선에 소개되어 180여년이 지난 후였다.

선교사 없이 교회를 창립 11년 후 교우들의 요청으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그는 약 6년 동안 활동 후 순교하였다. 그리고 박해는 계속되었고 정하상, 앵버르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 수많은 순교자가 뒤를 이었다.조선은 몇 백년을 충효의 유교철학이 통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으나 윤지충의 제사 거부가 발단이 되어 불효는 곧 바로 불충이며 반역 죄인으로 단죄되는 구실이 되었으며 반인륜적 사교로 간주되었고 천주교가 반상의 벽을 허물고 군주가 아닌 하늘의 임금을 섬김은 당시 지배층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박해는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개인의 미움이나 영달을 위해, 또 지배자의 지도체제 확립을 위해 자행되었지만 박해로 신앙을 멸하기는 어림도 없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65년 상해에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망명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을 만나 조선 선교를 결심하고 미국 상선(셔먼호)편으로 평양에 왔으나 미국 상인과 함께 피살 당했는데(1886년) 한 권의 성경을 남겨 조선인들은 이 성경으로 독학하여 후일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당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 신앙 선조는 죽음을 이기고 있었다.그리스도의 복음을 학구적으로 연구하면서 신앙으로 발전시켜 또 그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그 슬기로움과 신비스런 섭리를 세계 만방에 어찌 자랑하지 않으리.<이 글은 정두희씨의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와 박도식씨의 ‘순교자들의 신앙’을 참고해서 쓴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