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간과 역사 그리고 광화문

2007-01-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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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목사)

지난 9년의 고국은 칼 마르크스를 따르는 개혁 인사들이 본국의 혼란스러운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역사철학이나 그 어떤 인문과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과거사 정리’라는 말로 국민을 선동하고 천문학적인 국가 재정을 소모했다. 이제는 그것도 심에 차지 않아 광화문과 그 울타
리를 다시 헐고 ‘원래’대로 자리를 옮겨 도로를 10미터 정도 삐딱하게 점유하도록 하는 신축공사를 한다고 한다.

‘원래’나 ‘과거’라는 말은 역사라는 말 앞에 그럴듯 하게 나타나는 듯하나, 진정한 시간 속에서는 ‘원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 과거란 인간의 기억으로 존재하며, 미래는 인간의 희망이나 절망으로 존재한다. 무너진 문화재를 새로 복구했다 해도 그것은 과거의 환원이 될 수 없다. 현재의 자유로운 인간의 생각 안에서만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
현재야말로 현실이라는 복합성이 교차되고 이해가 요구되는 자리이다. 이를 떠난 말과 판단은 늘 착각으로 끝난다. 모든 사실의 문제는 현재에 있는 것이다.


현재와 관계가 없는 것은 거론할 가치가 없다. 당면한 현실에 책임을 지는 시간만이 우리들의 삶과 국력을 확실하게 하여 줄 뿐이다.
역사 앞에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칼 마르크스는 헤겔의 시간 관을 도입하여 진화론에 통합시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목적론적 유물사관을 만들었다. 그 결과 ‘평등, 분배’의 기치를 내걸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사회주의 공산혁명을 이끈 레닌을 배출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켰는가?

20세기의 비극이라는 1,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가 7,200만명인데 비하여 스탈린과 모택동이 혁명의 이름으로 1억7,000만명의 자국민을 희생시킨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에도 ‘평등, 분배’라는 개혁의 종착역은 칼 마르크스와 레닌을 만나는 자리이다.오늘날 고국의 개혁인사들 역시 160년 전의 유물사관에 물들어져 그들의 목적 앞에 책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비뚤어진 이론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형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변명하는 내용
속에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한계성 앞에 모두가 평등의 책임이 있다는 엄연한 진리 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이런 결과는 무모한 정책과 국민을 편 가르기 하는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다.

지난 한 해만도 중소기업들이 무너져 20대의 젊은이들 15만명이 일터를 잃었다. 현재의 실업자는 120만명이 웃돈다. 온국민이 절망에 빠져 울부짖는데 ‘과거사 정리’가 무엇이며 광화문을 다시 짓는 기념비적인 공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역사의 시간 앞에 진실하게 설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칼 야스퍼스는 “역사는 신성(神性)의 존재가 밝혀지는 장소이다”라고 했다. 역사는 초월자의 섭리로 향방의 말이 나타나는 곳으로서 그 시간을 살다 간 선열들의 말이 들리는 거룩한 장이다.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모두 오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질문하고 겸손해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인간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역사의 시간이다. 미국이 낳은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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