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하라!

2007-01-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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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에도 있다. 명예로 밥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다. 명예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지켜내야 하지만 죽은 다음에도 그 명예가 실추되어서는 안 된다. 한 번 명예가 어떤 이유로든 사라지게 되면 명예 회복은 좀체 하기 힘들다.

명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법관이 있다. 검사가 있다. 교수와 교사가 있다. 성직자들이 있다. 고위 공무원들이 있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 등이 있다. 이런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지도자들로서 사회인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적을 만들면 그 적이 언제 어떻게 자신을 해치려 모함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살다보면 이해관계에 얽혀 친구도 적이 될 수 있고 우방도 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이든 적을 만들었을 경우 당하게 될 피해는 그것의 진의를 떠나 감당해야 할 손해는 막대하다.
그 손해는 심적 물적 손해에 해당된다. 적이 나를 공격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 소설 같은 것을 써 유포하며, 특히 언론에 공개 될 때 받는 마음의 아픔은, 어떤 사람은 ‘화병’이 되어 목숨까지도 재촉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한다.

실제로 예부터 ‘화병’으로 일찍이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이게 다 적을 만들어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특히, 무방비 상태에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상황일 때는 그냥 손도 못쓰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이 되고 만다. 어느 한의사의 말에 “중풍예방에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뒤통수를 맞아도 절대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화를 냈다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스스로 화를 자초하게 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사실 ‘화병’이란 게 하루아침에 생겨지는 것은 아니다. 화가 나는데 어디다 풀 곳도 없고 받아주는 사람도 없는 억울한 사정일 때 이런 마음의 아픈 상태가 두고두고 쌓이고 모이다 보면 화병이 크게 도져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무고한 누명을 쓰게 되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케이스 중의 하나다.
그렇기에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보통사람들이 더 세상을 행복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이 없으니 공격당할 대상이 없다. 공격당할 대상이 없으니 무방비 상태라도 뒤통수를 맞을 일은 거의 없다. 뒤통수를 맞을 일이 없으니 뇌졸중이니 중풍 같은 것도 그런 사람은 피해갈 수밖에 없다. 화를 쌓아 둘 일이 없기에 그렇다.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명예가 실추될 때 행할 수 있는 처방은 여러 가지다. 그 중 하나는 그 명예실추의 원인된 사건이 조작이나 소설이었음이 밝혀질 때까지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있다. 이럴 때는 정말로 도인이 되어야 한다. 도사 같은 마음으로 그저 구름 가듯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지내 보내어 살아가야 한다. 정말 참기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결백이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때는 그렇게 하여야만 한다. 또 다른 방법은 소송을 하여 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길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물질적 손해가 많이 따름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 했다. 결국 돈이 많은 쪽이 이길 확률은 많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게 되어 있다.

사람은 살다 보면 자신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적이 저절로 생길 때가 있다. 단체나 조직의 한 일원으로 단체나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일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국가 같은 거대한 조직이라면 국가가 그 뒤를 보아주지만 그렇지 않고 작은 조직일 경우에는 자신이, 자신이 나아갈 길을 미리 예견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만 한다.
문제는 적이 되었다 해서 아주 작은 허물도 크게 부풀어 퍼뜨려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켜 매장시키거나 간접 살인 같은 짓을 하려하는 그 추한 인간의 죄의 성질 같은 모습에 있다. 그 죄의 성질은 모두에게 있다. 그것을 원죄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자신의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에게 노출될 확률이 많다. 그러니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적을 안만들 수도 없다. 어떻게 하다보면 적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삶의 모순이다. “여인을 상담할 때에는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하라!” 어떤 변호사의 말이 왜 이글을 쓰며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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