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를 위하여

2007-01-1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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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전 MBC 아나운서)

인간은 혼자 태어나 평생을 혼자 살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나와의 끊임없는 관계를 맺고 산다. 나와의 스스럼 없는 대화가 그것이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혼자서 은밀히 듣고 스스로 삭히기도 하는 이너보이스(inner voice), 즉 내면의 소리는 내 양심의 소리이면서 진실의 소리인 것이다. 아무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나만이 들을 수 있기에 은연중 나에게 또 다른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나의 상대가 나인 만큼 나는 나와 함께 평생동안 무수한 대화를 주고 받는 가장 가까운 동지인 셈이다. 그런 나에게 또 하나의 내가 없다면 세상 사는 것이 삭막할 것이다. 내가 나로 인해서 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나인 것이며 그래야만 스스로 믿고 의지하는 지혜가 생기고 힘도 나온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자기가 마음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다. 눈만 뜨면 부딪치는 수많은 자극들에 시달리다 보면 정신적 부담이 늘기 마련이고 자칫 자신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십상이다.


세상이 변화무쌍하면 사람의 마음이 자주 변하고 삼라만상도 바뀌는 법이다. 온갖 자극 속에 사는 삶이라서 나 다운 삶을 누리기 전에 주옥(珠玉)같은 세월이 저만치 가버린다. 거기에 내가 없기에 인생이 허망한 것이다.
내가 나를 쉽게 잊거나 나를 포기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다. 힘차게 살아온 그 자리가 내 자리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자리에 내가 보이질 않는다. 살아온 날들이 나의 중심으로 살아온 것 같지만 그 삶들이 나 다운 삶이 아니었다면 거기에 진정한 내가 있을 턱이 없다.

인생 고뇌의 출발점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없다고 자각하는 순간부터다. 나를 잃고 방황하며 나보다 타인들이 나를 더 잘 알게끔 되어 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해 본들 그 중심에 내가 없다면 이미 자신의 본질로부터 벗어나고 만 것이다.
내 곁에 서 있어야 할 또 하나의 내가 먼 곳에, 그것도 엉뚱한 곳에 서 있다면 그곳에 비록 돌아가 본들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까닭에 인생 자체가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한바탕 꿈같은 얘기다. 오죽하면 인생을 단편적으로 보면 희극이요, 인생 전체로 보면 비극이라고 했을까.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젊은이라는 것도 젊은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젊은 시절이 훌쩍 스치고 만다. 나에게 아직 부를 노래가 있다면 그 노래를 나를 위하여 불러야 한다. 나를 위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나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명상도 좋고, 운동도 좋고, 자신을 표백하기 위한 스스로의 고백도 좋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얼마 안 남았지만 조금 남은 여생은 나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겠는가…!”수상록(隨想錄)을 쓴 몽테뉴의 인상 깊은 말이다. 스스로 속아 살고 스스로 당하고 살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너무나 짧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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