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법체류자의 처신

2006-10-2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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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이상하게도 형사법원에 입건되어 오는 한인들의 거의 전부가 불법체류 신분인 사람들이다. 통역인 나를 거쳐서 간 사라들의 통계니까 통역을 통하지 않고 사건을 마무리한 사람들의 수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내가 법원에서 만난 한인들 중에 적어도 8,90%는 소위 서류미비자들이다.

왜 체류 신분이 합법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형사사건에 연루되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퀸즈지역에 사는 한인들의 대다수가 이런 신분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생활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이곳 형사법원은 뉴욕 주 법에 의한 사건을 다루는 곳이므로 형사사건으로 입건된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이민국이 취급하는 불법체류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고 법원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 일은 없다.하지만 이민국의 불법체류자 단속은 점점 더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어서 형사법원에서도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최근에 달라진 중요한 변화는 사건에 연루되어 24시간 이상을 구속 상태에 머물게 되면 그 명단이 이민국의 검토 대상으로 통보된다는 점이다. 즉 구속중인 피의자의 데이터를 이민국이 공유하게 됨으로 불법체류자인 경우에는 그 신원이 밝혀지게 된다. 그러면 이민국이 법원에 그를 석방하지 말고 구속 상태로 이민국에 신상을 인계하라는 통지를 보내게 된다. 그러니까 불법체류자가 구속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이민국의 조치를 당한다는 뜻이다.

최근에 이런 이민국의 조치 때문에 하찮은 사건으로 형사법원에 입건되어 구속되었다가 바로 추방조치로 이어진 한인들의 사건이 몇몇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형사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된다는 것은 이민국의 이런 조치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선다는 뜻이 되므로 체류 신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남다른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건되는 피의자의 대부분이 이런 불체자 신분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며칠 전에는 불체자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너무나 황당한 사건을 일으킨 한 청년이 있었다.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의 불법체류 신분인 이 청년이 새벽 3시에 플러싱의 노던 블러바드 대로에서 초고속 자동차 경주를 저질렀다. 90마일이라는 초고속으로 질주하면서 신호등을 무려 일곱개나 무시하고 달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자기 신분이 온전하지 못한 청년이 이런 짓을 저지른다는 것도 가관이지만 법원에 입건되어 신원파악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청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법원에 사건이 입건되는 날은 우선 판사가 다음 공판 날짜를 정하고 피고인의 출석을 믿을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보석금을 책정하는 재판이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으면 보석금이 명령될 확률이 당연히 높아진다. 위의 청년은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했고 자기의 전화기를 경찰이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전화번호 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단 한 개도 없었다.

미국에 온지 일년이 되었다는데 한번도 미국에서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지고 있는 ID라고는 타주에서 발행한 운전면허증이 전부였는데 그것 조차 의심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의 신원은 아무 것도 확인된 것이 없으므로 필경은 얼마간의 보석금이 정해지리라 생각되어 미리 청년에게 일러주었다.

그런데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단 한개도 없다니 보석금이 책정된다면 외부와 연락할 길이 없어 우선 형무소에 구금될 것이고 다음은 이민국의 추방조치에 들어갈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저지른 사건으로 보나 자기 신상의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빠진 생활태도를 보면 차라리 추방되어 한인사회의 하나의 티를 줄이는 것이 보탬이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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