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2006-10-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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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하여 먹는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구태여 대답을 끌어낸다면 사람은 살기 위하여 먹는 존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먹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은 곧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뜻도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험한 일을 맞아도 참고 살아야 한다’는 해석도 들어있다.
먹는다는 말은 반드시 음식을 입에 넣는 뜻만은 아니다. 먹는다는 뜻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돼 있다. 입으로 음식을 넣는 것도 먹는 것이지만 ‘삶 자체’를 먹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

사람이 태어나 사회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려면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생존경쟁 자체가 먹고 먹히는 관계이기에 그렇다.
사람의 본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식욕이다. 또 하나는 성욕이다. 식욕은 먹는 것이 전제 된다. 육체를 가진 사람은 먹음으로 인해 육체를 보존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식욕’에 ‘욕’자는 욕구를 말한다. “식욕이 떨어졌다”는 말은 “밥맛이 떨어졌다”는 뜻도 된다. 옛 어른들의 말에 “밥이 산삼보다 더 좋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밥만 잘 먹으면 건강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란 해석도 된다. 자신의 건강을 점검해 보려면 간단하다.


식욕이 좋고 편식하지 않으며 모든 음식을 골고루 다 잘 먹으면 건강하다는 신호다. 그렇지만 식욕이 떨어지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며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을 마음, 즉 욕구가 생기지 않으면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식도락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어느 음식점 음식이 맛이 있더라” 하면 그 곳으로 몰린다. 먹는 것도 고급화된 현상이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맛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사람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몸을 갖고 있다. 그 몸의 구조가 고기 같은 간단 구조의 어류를 제외하고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과의 차이는 거의 없다. 입이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듯이 모든 장기들을 사람이나 동물이 골고루 갖추고 있다. 기능면에서도 입으로 음식을 먹으면 장을 통해 위로 들어가 소화를 시킨다. 소화시켜진 음식물의 영양분은 몸의 구석구석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찌꺼기는 밖으로 배출된다.

전달된 영양분은 사람이나 동물들의 건강을 유지하게 한다. 사람과 다른 동물과의 큰 차이점은 사람은 ‘먹고’ 다른 동물들은 사람에게 ‘먹힘을 당한다’는데 있다. 이런 단면에서도 사람, 즉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웃지 못 할 해석을 유추할 수도 있다. 문제는 사람은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며 먹는데 그 ‘먹음’이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단순히 맛을 즐기기 위한 식도락에 있음이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죽임을 당한 후 사람의 입을 통과하고 있는지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할 것이다.
고등종교 중 한 종파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곳’이 있다. 사람과 다른 동물과의 평등성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 평등성이란 뜻 안에는 사람의 생명이나 다른 동물의 생명을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고차원적인 해석이 그 안에 함유돼 있을 것이다. 그 종파의 사람들은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하며 육식하는 것을 계율로 금하고 있다.

먹는다는 뜻에는 정복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강국이 약국을 식민지화 했을 때 그 강국은 약국을 ‘먹어치웠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화 되었을 때 일본은 조선을 결과적으로 먹어 치운 상태가 되며 조선은 일본에게 ‘먹힘’을 당한 상황이 된다. 또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이에서도 ‘먹었다’라는 표현은 쓰인다. 강자가 약자를 자기 손아귀에 넣었을 때에도 ‘먹음’과 ‘먹힘’의 관계는 성립된다.
이처럼 먹는다는 표현의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살기위하여 먹지만 어쩌면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 일런지도 모른다. ‘먹음’은 1차원적인 생의 필수 조건이다. 먹지 않고는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살기 위하여 먹는다”라고 할 때 사람은 먹는 것만 해결되면 족할 줄 아는 다른 동물처럼 1차원적 생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먹는다고 하는 고차원 문화적 존재라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지구엔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선진국의 애완 동물보다도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되면 낫겠다. 고차원적 문화적 삶이 아닌 1차원적 생명 유지를 위한 사람들에게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해결해야할 급선무기에 그렇다. 먹기 위해 사는 존재는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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