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글과 서재필

2006-10-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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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수필가/서재필기념재단 회장)

서재필 선생, 하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무엇을 먼저 써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독립운동가, 언론인, 의사, 외교관, 정치가, 실업가, 민주주의 선도자, 민중계몽가 등등... 그 중에서 ‘최초의 한글신문을 발행한 서재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에 직접 참여한 가운데 집현전에서 그 고고성을 올리며 태어났다. 그 창제 동기를 우리 말이 중국과 달라서 국민들이 서로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이를 불쌍히 여겨 우리 말에 맞는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훈민정음’이다.

그러나 중화사상이 뼈속까지 물든 당시의 양반들은 이 좋은 이름을 버리고 ‘언문’이라 불렀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쓰는 글 ‘아햇글’, 여자들이 쓰는 ‘암클’이라고 비하하며 배우기조차 꺼려했다. 이렇듯 한글은 원래 나랏글, 적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서자 대우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렇듯 조선조 내내 식자들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한글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중에서도 다행한 것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등 서민들을 사랑하는 선비들이 백성을 선도하는 글을 한글로 짓기도 했고 황진이같은 여인, 기녀들이 아름다운 시조를 읊어서 한글은 문학적으로도 손색이 없음을 증명했다.


조선 말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한글이 외국인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 면목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글판 쪽 복음을 들여와 비밀리에 민간에 유통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서민 전도의 목적이었으므로 여전히 중, 하류층의 글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재필선생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행하자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처음으로 한문 없는 순한글판 신문이 발행되어 무식한 상X들이라고 업신여겼던 서민들이 유식해지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을 읽으며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며 바깥 세상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에 놀란 양반들은 독립신문을 가져다 읽어보려 했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많은 양반들이 언문 글자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을 읽는 천민들은 글을 읽어 세상 물정을 알고, 양반들은 공자 맹자밖에 모르는 까막눈이 되어버렸다. 한문만이 진정한 글자요, 모든 공용문서는 한문으로 쓴다는 종래의 통념에 대변화가 온 것이다.
독립신문이 발행됨으로써 이제 한글이 국가 공용문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400여년 동안 수모를 겪어온 한글이 거듭 태어나는 순간이었다.(4월 7일 신문의 날)서재필선생의 ‘한글 살리기’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어가 띄어쓰기에 의해 글의 의미가 뚜렷해지는 점을 깨닫고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를 시도했다. 각 단어마다 독립성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한글은 종서의 형식으로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한 칸의 여백도 없이 연이어서 쓰게 돼 있었다. 한글은 그 기나긴 세월을 지내오면서도 아무런 발전 없이 그대로 쓰여져 온 것이다.

예를 들면, 송강 정철의 시조도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아바님날나흐시고어마님날기라시니두분곳아니시면이몸이사라실가하날가란가업슨은덕울어대다혀갑사오리>

이것을 현대말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에다 갚으리>

위의 두 문장을 비교하여 보면 띄어쓰기의 장점이 확연히 돋보인다. 독립신문이 발행된 다음 해 서재필선생은 주시경선생을 한글 담당 직원으로 채용하여 계속 한글을 개량하도록 독려했다.이 덕분으로 새로운 문체의 한국 문학이 태동하였다. 최남선의 ‘바다에서 소년에게’를 시작으로 윤동주의 ‘서시’,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로 한글은 계속 빛을 발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그래서 필자는 감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낳으신 분이고, 서재필선생은 한글을 길러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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