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2006-10-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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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국가의 탄생과 생존의 역사에서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전쟁을 한 나라이고 전쟁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는 안보 구조의 부조리에 처해있는 우리 한국이다” 미국을 전쟁광처럼 평가하면서 그 전쟁으로 인해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는 이 말은 북한의 어느 누구가 한 말이 아니다. 한국의 안보정책 책임자인 청와대의 안보실장이라는 사람이 공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6.25 때 미국이 한국에서 싸운 것은 미국이 전쟁을 좋아했기 때문이며 이렇게 미국이 싸워서 우리가 피해를 당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바로 북한이 하는 말인데 대한민국의 안보담당자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해괴한 일이 생길 수 있을까.또 한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민주평통의 부의장이라는 사람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2차 핵실험을 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있는 것인데 이 문제를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한국인은 물론 전세계가 규탄을 하고 있는데 통일 분야에서 지도급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핵실험을 당연시하는 듯하게 말하고 있으니 이 사람이 도대체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실험은 유엔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골치거리가 되고 있고 한국에는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을 이끌어가고 있는 현 정부의 요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때 이제 갈 데까지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지도층의 역사관이 북한과 같은 시각이라는 차원을 넘어 북한과 같은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데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진다. 다시 청와대 안보실장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북한이 협상을 통한 비핵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말로만 해도 부시행정부의 정책이 움직일 수 있다” 즉 북한이 핵무기를 없애겠다고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미국을 속이면 미국의 대북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북한에 이렇게 해 보라고 사기적 수법을 가르쳐주는 것같이 들리는 말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실험 후 햇볕정책이 북한에 핵개발의 자금원이 되었다는 비난에 대해 자신의 햇볕정책을 변명하고 있는 DJ는 북핵개발이 미국의 강경정책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러면 국민이 굶어죽고 국가가 파산 위기에 있던 북한에 햇볕정책으로 돈을 퍼주지 않았더라면 무슨 돈으로 핵 개발을 할 수 있었을까. 굶어 죽게 생겼는데 미국의 태도가 강경하다고 핵개발을 할 수 있다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공개강연에서 또 “북한이 2차 핵실험이나 휴전선에서 도발 등 반격에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게 도발을 하라고 넌즈시 알려주는 것인지, 한국의 국민들은 까불지 말고 겁먹으라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어쩌다 보니 지금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끌고 가고 있다.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미국에
서 멀리 멀리 북한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지난 10년간 이렇게 끌려가다가 뒤돌아 보니 참으로 멀리 와 있다. 6.25 때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공기를 흔드는 환영 인파가 몰려나와 시민들을 경악케 했는데 앞으로 그런 날이 멀지 않은 것같은 참담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할 때 6자회담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썩하기에 설마 핵무기를 만들겠는가 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핵실험을 하고 말았다. 지금 한국사람들은 북한이 설마 핵무기를 남한에 쏘겠는가 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쏘게 될 수도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설마 적화통일이 되겠는가 하고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한국이 이미 ‘적화’되었고 ‘통일’만 안되었다는 시중의 떠도는 말을 결코 웃어넘길 일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현재 한국의 정치 지도층이다. 이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과정을 들여다 보면 분명히 대한민국의 알맹이를 모두 빨갛게 바꾸고 껍데기만 그대로 남겨놓고 있다. 껍데기는 왜 그대로 두느냐 하면 대한민국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국민을 속이기 위한 것이리라. 그래서 야당이 여당이나 정부를 북한의 이중대니 북한의 앞잡이니 하면 여당은 발끈하여 난리가 난다. 그게 아니면 발끈할 필요도 없는데 자기네 정체가 드러날까봐서 더 난리를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제 이 난국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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