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조상에 대한 은혜를 잊지 말고

2006-10-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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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큰 복이다. 그러나 이 복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고 저주라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일생은 비참한 일생으로 끝마치게 될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그 자체는 확률이 2억여분의 1이다. 수억 달러 메가 복권 당첨되기 보다 더 힘든 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근본 원인은 부모가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니 부모의 은덕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어저께가 추석이었다. 추석은 성묘하는 날이다. 성묘만 할 뿐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님께 차례상을 차리는 날이다. 차례상이란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여 그들도 살아있는 것처럼 상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게 하는 것이다. 추석이 가진 이 깊은 뜻은 조상들에 대한 은혜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기억하자는 것이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 어느 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때 미국에 거주하는 아버지의 자손 8남매가 모였었다. 1976년도에 들어온 자매를 시작으로 20여년 동안 8남매가 미주에 들어왔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손을 10남매 낳았다. 그런데 한 형제가 실종됐다. 현재 살아있는 형제자매는 9남매며 한 형제가 한국에 살고 있다. 9남매를 통해 낳아진 자손은 형제자매 포함해 50여명이 된다.

홀홀 단신으로 조실부모하고 고아처럼 자란 아버지는 형제자매가 그리웠다. 경상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는 강원도로 와 강원도 처녀랑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딸을 많이 낳았다.
초등학교 다닐 때다. 아버지는 나의 발에 난 종기에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내 주었다. 그런 후, 그 발은 씻은 듯이 깨끗이 치유됐다. 그 발의 상처 난 흔적은 지금도 있다. 고름을 빨아주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그 상처와 함께 생생히 기억난다. 너무나 외롭게 자란 아버지의 관심은 자식들이 건강히 자라나 많은 자손을 보는 것이었을 게다.

아버지 장례식 때 보았던 원형 무지개. 그 원형 무지개를 따라 장지로 올라가던 형제자매들은 하나같이 환성을 질렀었다. “너무나도 좋은 징조”라고. 90이 넘어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돌아가기 전 잠시 동안 병원에 입원한 것 말고는.
어머니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지역 막내 여동생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남편이 목사인 여동생은 3남매를 낳아 잘 키우고 있다.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잘 한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막내 여동생의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나보다. 80이 넘은 어머니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화 한 통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식의 입장은 변명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 부모에게 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추석 이틀 전 뉴저지 지역에서 일어난 한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 소식은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하며 안타깝게 한다. 죽음도 그냥 죽음이 아니다. 86세 난 할아버지가 75세 난 할머니를 칼로 죽이고 자신은 40피트나 되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즉, 자살했다. 왜 그랬을까. 얼마 남지도 않은 생을 조금만 더 참으며 생으로 태어난 존재의 가치에 더 감사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 분명히 사연은 있을 게다. 함부로 말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아가면서 그 생을 복으로 알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러나 그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고 저주할 때 생은 비참한 결과, 즉 자살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사람에게 닥치는 한 생은 얼마나 굴곡이 많은가. 은수저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생이나, 가난한 집에서 나무수저를 물고 태어난 생이나 한 생은 한 생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닥쳐오는 한 생의 아픔과 슬픔은 그 누구에게도 다가온다.

‘나’에게만 닥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초초가 모여 분이 된다. 분분이 모여 시가 된다. 시시가 모여 하루가 된다. 하루의 낮과 밤들이 모여 달이 된다. 달달이 모여 일년이 된다. 일년이 모여 한 생이 된다.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된다. 영원은 초초의 집합, 순간의 집합들이다. 그러나 순간과 영원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영원 속에 순간이 있고 순간이 영원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순간을, 하루를 즐겁게 복되게 만들어 나간다면 그 복이 모여 한 생이 복으로 넘쳐나지 않을까.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큰 복이다. 그 복을 낳아준 부모의 은덕에 감사하며 감사를 행동으로 옮겨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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