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백들의 잔치 상

2006-09-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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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길(플러싱)

봉사센터 오픈하우스 잔치에 구경갔다가 강당 벽에 걸려있는 유화(油畵)들에 감탄했다. 그림 솜씨들로 봐서는 구상이나 색채감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출품을 해서 보는 이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을 그저 잔잔한 30여 점의 소폭 그림들이었다.

이 그림을 그린 분들은 초등학교 때 구레용으로나 그림공부를 했던, 그림 재질에는 겨우 1%의 소질을 가진 분들로, 노년기를 플러싱 경로회관에 와서 그림을 배우면서 서로가 화백(畵伯) 감투를 씌워주면서 은퇴 후의 여가를 취미로 그려낸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따금 경로회관에 가면 경로회관 화실에서 그 분들의 작품활동을 보면서 천재는 90%의 노력의 소산이라던가, 나같은 둔재도 캔버스 앞에 한 번 서보고 싶은 충동을 가지게 된다.그림은 몸과 마음을 쓰는 활동이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예술은 작가의 분신이다. 150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초상화에 착수해서 4년만에 완성했다. 이 분들의 작품도 모두 하나같은 다빈치의 ‘모나리자’ 작품이다.
사생아인 다빈치는 고향인 피렌체를 떠나서 밀라노로, 로마로, 프랑스로 전전할 때 그는 모나리자의 그림을 항상 분신처럼 갖고 다녔다. 다빈치는 죽기 3년 전인 1516년 가을, 프랑스 황제의 초청을 받고 당시의 환경에서는 노구인 64세를 이끌고 알프스산을 넘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프랑스의 앙보와즈시에 도착했다.

24세의 젊은 황제, 프랑스와 1세는 다빈치를 정중히 맞이해서 앙보와즈 근교에 저택을 마련하고 연금 2,000 에끄를 정해 주었다. 다빈치는 자기 방에 모나리자의 그림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조용히 바라보다가 누가 찾아오면 그 그림을 천으로 가리워서 감추었다.
어느 날, 프랑스와 1세가 아무 예고 없이 다빈치의 집을 찾았다. 황제의 행차 소식을 들은 다빈치는 미처 모나리자 초상화의 천을 내려놓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서 황제를 맞았다.

24세의 젊은 군주는 모나리자의 그림을 보자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 감탄할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이요, 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은 본 일이 없소. 이름이 무엇이요?” “피렌체의 어떤 시민의 아내로서 이름은 ‘모나리자’라고 합니다”
“이 그림은 또 무엇이요?” “‘세례요한’입니다”
“나는 이 두 그림을 모두 사고 싶소. 값이 얼마요? 사양하지 말고 값을 말해주시요” “폐하, ‘모나리자’의 그림만은 팔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4,000 에크면 되겠지요?” 그것은 다빈치에게서는 평생동안 만져보지도 못한 거액이었다. 그날 밤, 다빈치는 황제를 찾아서 궁정으로 갔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그 그림은 팔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돈을 원치 않습니다. 폐하에게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는 날까지 그 그림을 제 곁에 놓아두게 해 주십시오”다빈치는 그가 임종할 때까지 모나리자를 자기 곁에 두었다.모나리자는 다빈치가 죽은 후 프랑스와 1세에 의해서 루브르 박물관에 비치되어졌다.이 분들의 그림도 그런 그림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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