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님의 핸드폰

2006-05-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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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 김 (부동산 브로커)

4년전 근 일년만에 뵙는 어머니는 눈에 띄게 쇠잔하셨다. 어머니는 청상과부의 올곧은 성격이라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미국에서 아들네와 사는 것도, 인근 도시의 딸네 집에 사는 것도 한사코 거절하고 조그만 아파트에서 홀로 살기를 고집하셨다.
아버지가 6.25 동란중에 전사하여 반세기 넘도록 두 남매를 홀로 키우면서 가시밭길 풍상을 겪은 탓인지 얼굴에는 굵은 주름과 검버섯 사이로 짙은 고독과 한이 스며 있었다. 짧은 모국 나들이 중에 모처럼 짬이 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어머니가 말머리를 조금 엉뚱한 데로 돌리셨다.

“덕아, 요사이 한국에는 국민학교 애들에다 노인들까지 손에 전화기를 들고 다니더라. 안 가진 사람은 이상해 보일 정도란다”“아, 그 핸드폰 말이죠? 매일 신문에 노숙자니, 실업자니 못산다고 아우성치면서 쓰잘 데 없는 잡담하려고 돈을 그렇게 쓰는지 한심해요. 미국에는 고등학생도 거의 안 가지고 있어요. 집사람도 애들도 없어요” 열을 내서 혀까지 차는 나를 빤히 보시던 어머니는 “그래도 급할 때는 쓸모가 있을거야...” 혼잣말처럼 말꼬리를 흐리면서 어딘가 허전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로부터 반년쯤 지나 토랜스로 이사를 했는데 이 동네는 셀폰이 터지지 않는 난청지역이었다. 그런데 이사한지 며칠이 안된 심야에 셀폰이 신기하게도 울렸다.한국 살때 의형제를 맺었던 분이 화급한 목소리로 “여보게, 침착히 듣게. 자네 어머니가 이틀 전에 돌아가셨어. 누님이 아무리 자네 집에 전화해도 되지를 않고 경황 중에 명함도 찾지 못하다가 내가 자네 명함을 보고 연락하네”이사를 하여 새 집 전화도 알리지 못했다는 말 같잖은 변명을 할 겨를도 없이 복받쳐 오르는 오열이 셀폰을 적셨다.

외아들 상주의 입국을 기다리기 위해 5일장을 준비한 탓으로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입관식을 가졌다. 이 세상에서 겪은 고통도, 고독도, 미련도, 한도 다 씻어 버린 듯,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 온화하게 보였다.
장례식을 마친 다음날 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화장대 서랍 속에서 돋보기 안경과 섞여있는 예상치 못한 전자 제품을 발견하였다. 아담한 핸드폰이었다.
반년 전 그 자리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허전한 미소가 뇌리에 섬광처럼 스쳐갔다. 황급히 충전기를 찾아 핸드폰을 꼽아놓고 있는 동안 온갖 상념과 회한이 교차하였다. 드디어 핸드폰의 메뉴에 들어가 소지자 전화 번호를 알아낸 다음, 집 전화를 이용하여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신호가 계속 가고 이윽고 말이 나왔다.

“전화를 해 주어서 고마운데 받지를 못하네요. 할 말이 있으면 남기세요”아! 어머니의 여린 음성.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두 전화기를 양손에 들고서 나는 외쳤다.“어머님! 어머님! 어디 계세요. 정말 죄송해요. 어머님이 핸드폰을 갖고 싶으셨다고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당신이 위급할 때 이 것으로 자식과 손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셨던 것도 미처 몰랐어요. 아들한테 핀잔 들을까봐 핸드폰 샀다는 것도 숨기시고 아마 이웃 분들께는 미국서 온 아들이 사 주고 갔다고 자랑하셨을 테지요. 어머님의 마음을 제 머리에 흰 눈 덮인 이날까지도
헤아리지 못하는 이 못난 불효 자식을 용서하여 주세요. 제발 이 전화 받으시고 한 말씀만 해 주세요.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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