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생사(生死)는 일여(一如)’

2006-04-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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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평소 잘 알고 지냈던 한 친구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병은 암이다. 투병 중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방법이 생각 안 난다. 열심히 교회도 다니던 그다. 이제 그는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 종교적인 위로 외에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다. 죽음이란 모든 사람들이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관문이다.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 사람들은 들어간다. 그 다른 세계란 종교로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죽음 너머의 세계 유무(有無)를 설명할 수 없다. 죽음과 태어나기 전과의 차이를 하나로 보는 관점도 있다. 죽음 너머와 태어나기 전의 상황이 같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편에 보면 장자의 사생관, 즉 태어나기 이전과 죽음 이후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됨을 엿볼 수 있다. 이 말은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라 하나란 뜻이 담겨 있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그의 친구 혜자가 문상을 간다.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혜자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자식을 키워 함께 늙은 처지에 당신
의 아내가 죽었는데 곡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정할 텐데 질그릇을 두들기고 노래를 하고 있다니 이거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나무란다.
그랬더니 장자 왈 “아니 그렇지 않다.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냐. 그러나 그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다. 그저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아내는 변해서 죽어가는 거다. 이는 춘하추동이 서로 사철을 되풀이하여 운행하는 것과 같다. 아내는 지금 천지(天地)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다. 그
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 한다면 나는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哭)을 그쳤다”고 말한다.

또 다른 장자의 일화가 있다. 장자가 죽음에 이르러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하려 의논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아챈 장자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나는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으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 즉 해와 달로 연벽(連璧), 즉 쌍벽을 삼고 성신(星辰), 즉 별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萬物)이 조상객(弔喪客)이니 다 구비되어 있다. 내 장례식에 무엇이 더 필요 한가” 하여 그 의논을 중단하게 했다. 이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매장을 소흘히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장자는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 속의 벌레와 개미의 밥이 된다.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 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준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하여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죽음의 문제는 명이 다하여 즉, 수가 다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는 슬픔과는 별 상관없이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수를 다하여 죽음을 맞는 장례를 호상(好喪)이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 사람은 죽음을 슬퍼하게 된다. 친구는 60이 안 된 나이다. 자식들 결혼도 지켜보아야 하고 손자도 맞아 재롱도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의 상황이 너무 안 좋다 하니 그저 마음으로만 그를 위로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죽음에 대한 종교적 풀이는 기독교는 영생을, 불교는 윤회로 설명한다. 기독교의 죽음은 예수가 죽은 후 다시 살아남과 같이 보통 사람도 예수와 같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난다. 다만 죽은 후 심판을 받게 된다. 심판 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들어가게 된다. 불교의 윤회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고 다른 생물로 태어날 수 있다. 다만 해탈, 즉 열반에 든 사람은 또 다시 윤회하여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극락으로 들어간다. 불교에도 지옥관(地獄觀)은 있다. 사람의 죽음이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분초마다 사람들은 죽음을 맞고 있지만 감지를 못할 뿐이다. 숨을 내쉬고 들어 마시는 속에 삶과 생명과 죽음이 함께 있기에 그렇다. 숨이 완전히 멈추어지는 날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된다. 어쩌면 장자의 사생관(死生觀)처럼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생사(生死)가 일여(一如)”일 수 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의 품에 안기는 인간들. 그래도 돌아가 안길 곳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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