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이 지기로소니

2006-04-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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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기(롱아일랜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 우런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
라.>
조지훈 시인의 ‘낙화’란 시다. 몇년 전 뉴욕출신 DJ정권 실세였던 P씨가 검찰에 구속되면서
꽃바람 발언을 해 꽃을 모독치 말라고 반대당 의원의 질책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토록 아름
다운 시가 적절치 않은 장소와 시간에 인용이 되어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은 마음 아픈 일
이다.
봄은 게으름 피우고 늑장 부리고 왔다가 변덕 부리며 급하게 가버리는 길손과 같다. 특히 뉴욕
의 봄은 짧아서 어떤 때는 겨울에서 여름으로 by pass해 버릴 때도 있다. 올해는 차례대로 피었다가 지고, 순서도 없이 개나리, 자목련, 벚꽃, 철쭉들이 동시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꽃을 떨구어버릴 것만 같다.

‘사랑의 테마’란 노랫말에 <사랑,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네. 사랑 보내지 않아도 떠나가네> 처럼 봄도 보내지 않아도 가버리고 꽃도 지는 꽃 그대로 붙들어 둘 수가 없어 시인들이 아픔을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두견의 피맺힌 울음 때문에 철쭉이 붉게 물들 리 없지만 철쭉을 볼 때마
다 두견의 울음이 연상됨은 웬일일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는 사람 앞에 꽃이 따다 뿌려 밟고 가게 할 세대는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걸까?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봄을 여읜 설움에 잠겨 아파할 사람들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어 안타깝다.


어딜 가도 삐삐 삐삐 울리는 전화 소리, 컴퓨터 게임, 상업광고, 계절은 계절대로 가슴은 가슴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몸은 몸 대로, 따로 따로 물과 기름처럼 흘러가고 있다. 불청객 황사가 불어와 학교도 닫고, 비행기가 결항을 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고, 날아드는 철새도 조류독감 이동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가축도 병들고, 물고기도 죽어가고, 남·북극도 열병으로 녹아가고, 바다 밑도 요동치고, 화산도 분노하고, 땅밑도 들끓어 지구 전체가 병들어 가고 있다.

이라크에선 젊은 생명들이 꽃잎처럼 지고 있는데도 차츰 관심 밖으로 벗어나고 있다. 김정일은 금강산 관광으로 돈을 퍼주고 있는데도 무례와 오만으로 기자와 관광객을 위협하기 일쑤고, 손 내밀어 비료 달래기를 빚 준 사람처럼 당당히 요구하는 꼴이며 수퍼 노트, 마약밀매, 강제수용소 만행, 납치 등은 수치의 대상이 아닌지 오래 되었다. 국민을 굶겨 소인국이 되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질 않는다.
일본은 역사 왜곡에다 심심하면 독도가 제 땅이라고 억지 부리다가 이젠 무력행사까지 하려고 들고 있다. 중국도 돈 있고 힘 생기니 동북공정하며 고구려가 자기네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미국과의 관계도 껄끄럽고 북한 비위 맞추랴, 중국 눈치 보랴, 껍쭉껍쭉 신경 건드리는 일본 보랴, 마치 바람에 꽃잎 흔들리듯 열강의 바람 앞에 한반도가 위태로운 것 같아 안타깝다.

재벌들은 탈세 탈법하여 치부하고 정권에 주고 받고 공생하다가 정권 바뀌어 칼날 닥치면 헌납이나 도피로 소나기 피했다가 조용하면 다시 되풀이하고, 구청장 공천에 몇억씩 받고 들통나면 억울하다니 하기에 으례 그렇게 하던 것 왜 나만? 억울할런지도 모른다.
공기업, 사기업, 정부 할 것 없이 상관의 대소사에 가정부 노릇 잘 하면 남편 진급 승진시키고 그것 못하는 사람은 남편은 찬밥 신세고, 유치원 반장 선거에도 돈이 오가며 자녀 교육 때문에 이산가족 기러기아빠, 울고 싶은 남자들을 양산하는, 뭔가 궤도를 이탈해 사회가 비틀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춘래불사춘이라고 했던가? 정녕 봄은 꿈을 안고 찾아와 얼었던 가슴들을 녹여줄 수는 없을까? 꽃처럼 활짝 피어 향기로이 웃음 가져다 줄 마음의 봄은 아직도 더 기다려야만 한단 말인가. 얄궂은 봄날씨가 나른함만 더해주고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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