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활절 무렵

2006-04-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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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목사/미디어선교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다. 믿을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 많다. 부활은 커녕 달걀이 부화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이다.
병아리 한 마리가 하얀 달걀 속에서 생성되고, 한 점의 생명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지 그 신비를 설명할 사람은 없다. 생명의 탄생과 삶의 과정과 죽음까지도 ‘왜 그래야 하는지’ 누가 과연 설명할 것인가?

믿음이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생명과 존재의 이유를 알기 위해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다. 일상적인 삶과 죽음을 쉽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생명의 ‘원형과 원인’이 있고 이생의 삶은 모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생명의 원형으로에의 회복인 영생을 소망하게 되었고, 그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믿음을 가진 다음에야 나는 나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단한 인생길에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홀로그램(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의 단계로서 부활을 인정한다.


역설적으로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메시아)가 아니라면 예수는 인류역사상, 지구가 생긴 이래 최고 최대의 사기꾼임에 틀림 없다. 현대의 수십억에 이르는 모든 기독교 신도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도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고,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를 믿었던 모든 신자들은
사실 사기를 당했을 뿐이다.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죽은 순교자들, 그 권위에 무릎 꿇은 역사상 모든 황제들은 거짓말쟁이 시골 목수에게 속은거다. 뿐만 아니라 올해 2006년 달력을 걸어놓은 모든 사람들은 믿던 안 믿던 그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달력의 연도마저도 예수의 탄생
을 기점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환언해서 예수가 희대의 사기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가 구세주인 것을, 메시아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둘 중에 하나이지 둘 다 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실존적인 문제인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법은 ‘사랑’이다. 그 밖에 것은 다 껍데기이고 거짓말이다. 예수가 ‘사랑’을 가르치므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가 탄생하고 부활하던 무렵에 시대적 배경은 로마시대이다. 이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도 있지만, 최근에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로 각광을 받는 작품은 일본 여성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인간과 영웅들의 역사소설로 이보다 더 재미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시대의 인간상은 야만보다 조금 낫고, 남녀들의 행위는 동물보다 조금 나을 뿐인 것을 볼 수 있다. 그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변방에서 살던 목수, 예수라는 사람은 오늘날 그 강대한 제국과 왕과 영웅들 보다 더 많은 영향을 인류에게 남겼다. 예수의 부활로 증명된 그의 사랑의 약속은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프랑스의 문호 빅톨 위고는 “나는 누군가 목숨을 바쳐서 증거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하긴 거짓말을 관철하기 위해서 죽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부활절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이 본 부활의 사건은 인류사의 최대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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