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라이사의 남편 사랑

2006-04-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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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라이사(Lisa)는 나와 같은 직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40대 후반의 흑인여자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명패를 보고 ‘리사’로 불렀더니 자기 이름은 ‘라이사’로 부른다고 정정해 주
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둔 것은 그녀가 특별히 매혹적인 용모를 가졌거나 뭇남성들의 눈길을 끌
만큼 관능적인 몸매를 가졌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미국남성들은 여성을 볼 때 대체적으로 얼
굴보다는 체형을 먼저 살핀다. 그리고 또 거기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자
들 또한 그런 사실을 십분 잘 알고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기의 몸매를 남에게 더 잘 나타낼 수
있을까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라이사는 5피트2인치 정도의 다소 작은 카에 걸어가면 땅이 울릴 정도의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남자들의 정신을 빼놓는 ‘팔등신’이나 미인대회의 표준규격 격인 ‘36-23-36’ 사이
즈와는 별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다. 그녀는 아예 그런 것 따위는 무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개의치 않는 스타일이다.
머리는 가발을 써서 항상 같은 헤어스타일에, 옷은 한복같이 헐렁한 것만 걸치고 다닌다. 그런
데도 나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은 그녀의 독특한 휴식시간을 보내는 방법 때문이었다.
휴식시간이 되면 다른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거나 휴게실에서 커피나 스낵을 먹
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녀는 항한 한적한 곳에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것이 그녀의 휴식 방
법이다.

어느 날, 그 날도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것을 보고 나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살짝 닥아서서 있다가 인기척에 깬 그녀에게 “나는 너의 머리통이 땅에 떨어지면 받쳐주려고 지키고 서 있다”고 농담을 걸었더니 그녀는 “걱정하지 마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다”고 응수
하며 깔깔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회사 내에서 그녀의 유일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그런 후에야 그녀는 자기 남편과 네 자녀를 키우고 있고, 또한 자기는 파트타임만 3개의 직장이 있다는 사실도 얘기해 주었다.
2년 전, 폭설이 내려 모든 가게들과 회사들이 문을 닫은 날이 있었다. 그 다음날 회사에서 만난 라이사는 휴식시간인데도 졸지 않고 자기의 어깨와 팔을 주무르고 있는 것을 보고 닥아선 나에게 “미스터 챙, 어제 내 남편이 동네 집앞의 눈을 치워주고 250달러나 벌었다”고 자기 남편
이 대견스럽다는 듯 자랑을 했다. “너도 도왔구나?”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순간, 과연 내가 여자였더라면 남들은 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남의 집 앞의 눈을 치우겠다고 나서는 그 잘난(?) 남편을 따라 눈삽을 어깨에 메고 나설 수 있을까. 그리고 또한 그런 사실을 무슨 자
랑이라고 남에게 얘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라이사는 평소 내가 통상적으로 생각해 왔던 여자로서만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자존심을 생명처럼 아끼는 그런 여자는 분명 아니었다.


그 해 여름, 어느날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 반기면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자기의 처지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인데도 남편 몰래 몇 년을 저축했던지 자기 남편의 50회 생일을 맞아 ‘깜짝 선물’로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후 여행동안 찍은 사진 한뭉치를 손가방에서 꺼내어 주면서 나에게 보라는 것이 아닌가.
갑판 위에서 목에 화환을 걸고 흰 양복에 환한 웃음을 띤, 마치 남해 소국의 왕과도 같은 남자는 자기의 남편이었고 역시 꽃다발을 안고 그의 팔짱을 끼고 선 왕비(?)는 분명한 라이사였다.

나는 그 많은 사진들을 건성으로 넘기면서 의자에서 졸고있던 라이사, 남의 집 앞 눈을 치우던 라이사, 지금 이렇게 왕비가 되어 지극히 행복감에 젖어있는 라이사가 동시에 오버랩 돼 오면서 이 사진 속의 순간 순간들을 위해서 그토록 고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존경과 갈채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빌어주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란 집을 짓기 위해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손수 한장 한장의 벽돌을 쌓아왔음을 깨달았다. “It’s very nice”하고 나서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원더풀” 한 마디를 더 얹어주면서 미
소를 머금은 나의 눈빛과 그녀의 눈빛이 잠시간 수평으로 연결되면서 나는 그녀로부터 멀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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