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혼혈시대’ 대비해야

2006-04-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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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한국계 혼혈인인 하인스 워드가 미국 프로풋볼의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하자 한국에서는 혼혈인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혼혈인을 백안시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박해를 하던 그릇된 사고방식을 버리고 혼혈인을 포용하자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내던 혼혈인들도 눈에 띄게 활기를 찾고 있다. 국제결혼과 혼혈인에 대한 인식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도 국제결혼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민 초창기의 한인1세들은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적 사고방식 그대로였다. 자녀들이 국제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강력히 반대하여 한국인간의 결혼을 고집했다. 그러나 외국인들과 결혼 기회가
많은 자녀들은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를 국제결혼 시킨 부모는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남들 앞에서 숨을 죽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국제결혼이 보편화 하면서 이제는 한인들간에도 국제결혼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혼인하던 결혼풍속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이 개방화, 세계화가 되면서부터이다. 6.25전쟁으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미군과 기지촌 여성들의 국제결혼이 사회적 추세로 나타난 시작이었다. 그 후 한국경제의 급성장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동남아 등 지역에서 외국노동자들이 한국에 대거 몰려들어 이들과 한국인 여성간의 국제결혼이 많아졌다. 그리고 2000년에 들어서면서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는 농촌의 남성들이 동남아와 중국 등 외국의 여성들과 결혼하면서 국제결혼은 봇물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군 단위로 볼 때 어떤 지역은 국제결혼이 연간 전체 결혼건수의 40%가 넘는다고 하니 한국이 바야흐로 국제결혼과 혼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일민족의 국가임을 자랑해 왔다. 좁은 반도지역에 고립되어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온 우리 민족은 세계에 유례없는 단일민족의 혈통을 지킬 수 있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의 단일국가를 유지해 오면서 그것을 긍지와 자부심으로 삼았다. 이 긍지와 자부심이 타
민족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혼혈인을 차별하는 편협한 의식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한국인이 결코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대에 한민족이 형성될 때부터 북방민족인 한민족에는 일부 남방계가 섞여 들었고 그 후 북쪽에서는 중국계와 만주계의 혼혈현상이 심했다. 고구려의 경우 지배층은 한민족이었지만 피지배층에는 만주족
이 많았고 삼국통일 후에는 중국이 대동강 이북을 점령하고 있었다. 고려 때는 몽고의 침략, 이조 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으로 외국계와 혼혈의 기회가 많았다. 조선시대 때만 해도 함경도 변경은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같은 한민족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중국계, 몽고계, 만주계 또는 일본계의 피가 많거나 적게 섞여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한민족에 40%의 외국계의 피가 섞여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한민족이 이제 본격적인 혼혈의 시대를 맞이하여 더 이상 단일민족의 순수혈통을 고집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지역감정에다 무슨 인종, 무슨 민족의 피가 얼마 섞인 혼혈인이라는 것까지 따진다면 나라가 풍비박산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라와 민족이 이처럼 반드시 일치하지 않게 되었으니 남북한이 한민족이라는 것만으로 통일의 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단일민족의 허물을 벗고 다민족 혼혈국가로 변모하는 한국은 이제 어떤 모습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인가. 마치 가족끼리 하던 회사가 주식회사로 발전했을 때 회사의 운영이 달라지는 것처럼 나라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가족끼리 회사를 할 때는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잘 뭉칠 수 있었고 가족의 일이기에 모두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식회사로 규모가 커지면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이면 회사의 정신과 목표, 그리고 인적 결속을 도모하고 능률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혼혈인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세계의 대표적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나 중국 등 각국의 인종 및 민족문제, 사회제도나 문화현상 등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제 한국에는 각기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국민적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한데 묶는 정치적 지도력이 요구되고 있다. 파쟁과 분열의 지도력이 아니라 통합과 포용의 지도력으로 국가의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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