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녹색(綠色)은 점점 짙어가고

2006-04-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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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綠色)은 점점 짙어가고
이영소(포트리)

봄소식을 맨 먼저 알리는 전령은 뭐니뭐니 해도 천실만실 가지를 늘어뜨리고 하늘거리는 버들이 아닐까. 이미 절기로야 봄이지만 다른 초목들은 꽃샘 추위에 놀라 감히 싹 틀 엄두를 못내고 암갈색 표피 속에 움츠리고 있는 사이 버드나무만은 용감하게 영하의 추위를 뚫고 노란 연
록색 새싹을 냈으니 말이다.
그 이후 주말부터 음산했던 바람도 씻은 듯 가시고 잿빛 구름도 활짝 걷혀 밝은 하늘 아래 가득히 햇볕이 쏟아지고 60도가 넘는 포근한 날씨가 펼쳐지니 일찍 잎이 움튼 버들가지는 한층 더 윤색이 돌고, 늦잠에서 깨어난 초목들도 다투어 새 순을 밀어 내느라고 부산한 모습이다.
오래잖아 오고 가는 거리며 야산에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는 봄의 향연이 눈부시게 막오를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이 되었다.

옛날 시문(詩文)에 밝았던 선비들은 봄이 찾아들면 으례히 조춘(早春) 시제로 일찍 잎이 돋아나는 버들(柳)과 유난히 짙은 붉은색으로 꽃을 피우는 도화(桃花)를 즐겨 선택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버드나무는 쉽게 눈에 띄는데 고국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복숭아꽃만은 쉽게
볼 수가 없다. 풍토가 다르면 초목도 자생이 다른 모양이다.
버들잎과 복숭아꽃 시(詩)에 얽힌 일화 한 가지.
고려 때 절창(絶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정지상(鄭知常)은 그의 재명(才名) 때문에 불측한 화를 입는 불운한 시인이 되고 만다. 그가 고려 예종 때 장원급제를 하여 문학을 숭상하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윤근, 김부식, 곽여 등 당대의 명신 명류들과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이였
다.


그는 문신으로 뿐 아니라 인종임금 때는 간관(諫官)으로써도 말이 곧고 당당하여 쟁신(諍臣, 임금의 잘못을 직언으로 간하는)의 풍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왕의 총애도 아랑곳 없이 서경(西京) 천도를 놓고 일어난 <묘청의 난>에 연루, 역모로 몰려 개경에서 평장사(平
章事) 김부식으로부터 아깝게 주살되고 만다.
뒤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부식이 평소에 정지상과 문자간에 이름을 가지런히 하여 불평을 가졌다가 묘청의 난에 이르러 내용을 핑계삼아 죽였다”고 아까워했다는 것이다.

원귀가 된 정지상은, 어느 날 김부식이 “柳色千絲綠(유색천사록)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천실만실 버들가지는 푸르고 만송이 복사꽃은 붉도다”라고 시를 지으니, 문득 공중에서 정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치며 “누가 천실이나 되는 버들가지를 세고, 만 송이나 되는 복사
꽃을 세겠느냐” 그냥 柳枝絲絲綠(유지사사록),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 버들은 가지마다 푸르르고 복사꽃은 점점히 붉다고 하면 좋지 않으냐”고 힐난했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또 야화(野話)에 전하는 정지상은 다섯살 때 강물에 노니는 해오리 모습을 보고 “하인장백필(何人將白筆), 을자사록파(乙字寫綠波)... 누가 감히 장한 붓을 잡아, 푸른 물결에 을자를 써놓았는가”라는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소년기에 친구를 이별하고 지었다는 절창(絶唱) 시로 전해지는 <대동강 송별>을 여기에 옮겨본다.

- 송우(送友) -
雨歇長堤 草色多(우갈장제 초색다), 送君南浦 動悲歌(송군남포 동비가) -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진한데, 남포에 임 보내니 노래가락 구슬프고나 大同江水 何時塵(대동강수 하시진), 別淚年年 添綠波(별루년년 첨록파) 대동가강은 어느 때 마를건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하네.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그 봄을 느끼는 감정은 충만해도 남들이 함께 따라 읽고 공감할만한 글을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했듯이 서투른 작문을 늘어뜨리기 보다는 차라리 옛 사람의 봄 풍류에 얽힌 고사를 소개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여겨
정지상의 이야긱를 두서없이 옮겨 보았다. 봄 이야기로 詩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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