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빈 배가 흔들리는 포구에서

2006-04-0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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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무작정 집을 나서는 주말, 가고 싶은 만큼 산을 보며 가기도 하고, 멀리 갈수록 좋을 것 같아 강이나 바다를 끼고 정처없이 가기도 한다. 산을 보며 뻗은 길은 산이 잘 보이도록 놓였고, 강이나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은 조금은 더 멀더라도 되도록 물가에 눈을 띠지 않고 구불구불 닦아
놓은 길이 미국의 길이다.

몇 백 마일이나 갔을까? 그 날 나는 목적지 없이 바다를 끼고 가다가 무명의 어설픈 포구에 잠시 들려 이제 막 고기잡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작은 배를 보고 있었다.
포구로 돌아오는 낡은 고기잡이 배를 보면 쓰다듬어 주고 싶도록 정겹다. 풍랑에 시달리면서 잡아올린 물고기 몇 마리, 격랑에 시달리며 살아온 우리 이민의 얼굴과 같기에 슬프기조차 한 작은 고기잡이배가 내 눈에는 거대한 화물선 보다도 더 크게 보인다. 순서 없이 쌓인 그물과 빈 물병들, 소금기에 젖은 나무 조각들이 전부다. 그것이 풍랑에 시달리며 고기잡이 나갔던 고기잡이 배의 돌아온 얼굴이었다.긁힌 자국이 많은 퇴색한 저 작은 배! 돌아온 포구에서도 찬물에 발을 담구고 흔들리고 있었다.


고기잡이 출항 때의 힘찬 기백은 보이지 않는다. “기백이 뜨거웠을까?” 기백이 있으되 그 기백이 뜨겁지 않으면 모양을 만들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얼굴이 있고 이민자에게는 이민자로서의 얼굴이 있다. 이 얼굴은 흔들리면서 뜨거울 때에 그 모양이 형성된다. 성공하고 싶을 때 사람은 그 생각이 뜨거워지고 인간이 인간이고자 흔들릴 때 사람의 마음은 뜨거워진다. 종교인이 뜨거워지면 참 종교인이 되고
장사꾼이 뜨거우면 그 때에 돈을 벌며 장사꾼으로서의 얼굴을 다지며 성공한다. 종교에서 뜨겁지 않은 사람은 가식이고, 장사에서 뜨겁지 않은 사람은 장사꾼이 아니다.

메주도 뜨거울 때에 메주의 모양을 뜨고, 사랑도 뜨거울 때에 부부의 연을 맺는다. 쇠도 뜨거울 때에 돌덩이에서 쇠를 걸러내고 뜨거울 때에 용도에 따라 모양을 낸다. 예술가나 문학을 하는 사람도 뜨거울 때 작품이 나오고 뜨거울 때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다.겉모양으로 예술가요, 겉모양으로 시인이나 수필가의 흉내를 내어서는 진정한 문도(文徒)가 되지 못한다.이민의 초기는 누구나 뜨겁고 무슨 일을 하든지 처음은 모두가 뜨겁다. 모두가 다 뜨거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모양새가 다 다르다. 뜨거울 때에 각자가 나름대로 모양을 만들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양 없이 흉내만 내다가 떠밀린 자가 되고 말았다.

시작은 같았으나 결과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시작은 같았으나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시작은 뜨겁게 같았으나 그나마 흔하고도 흔한 집사에 머물렀고, 어떤 사람은 그 흔한 집사의 대열에도 끼지를 못했다. 어떤 사람은 시집을 내고 수필집을 냈는데 어떤 사람은 뒷소리
만 요란했지 흔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구멍가게에서 대형의 상점으로 발전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십년, 이십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일편단심 구멍가게에다 하품으로 충성을 바치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마저 다 날리고 힘겨운 생활에서 가족들을 구제하지 못한다. 진실로 뜨겁지 못했기 때문이다.

끓는 물은 조용하지 않다. 거기에는 스스로 몸 비비는 소리가 있고 끓는 물결이 있다. 목적이 있다는 증거이고 모양을 내겠다는 몸부림인 것이다. 된 사람이나 잘 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 걸맞는 계획과 생활 태도가 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철저히 가릴 줄
알고 또한 어떤 것이 중요한가를 철저히 알고 시행하는 공통점이 있다.
풍랑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삶의 길과 인생살이에는 성패의 길이 정감록의 토정비결처럼 소리 없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격랑에 흔들리며 살다가 돌아가는 이민의 포구, 이웃을 헐뜯고 사기하다가 잡은 물고기 한 마리 없이 퇴색한 채 찢어진 그물이 이민생활에 다 라면 헛되고 슬프지
않겠는가!
시작보다 과정이 뜨거워야 하고 결론은 아름다워야 한다. 소멸의 찬란한 값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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