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사오이 법안’이 해결책이다

2006-03-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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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요즘 미국이 이민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불법체류자가 1200만에 육박하면서 반이민 정서가 강화되고 있고 이에 맞서 이민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반이민 정서는 일부 지방의 주 또는 카운티 차원에서 불체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조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
금까지 조용하게 있던 이민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민자들의 시위가 바로 그것이다.

불체자에 대해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불체자들이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부당하게 공공부조의 혜택을 받음으로써 미국 경제와 재정에 피해를 준다고 말한다. 또 미국사회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켜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불체자 옹호론자들은 불체자들은 미국인들이 꺼리는 직업을 갖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경제와 재정에 도움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정신에 비추어 인도적인 측면에서도 불체자를 구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이민, 특히 불체자 문제는 이런 표면상의 이유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사회의 근간을 이룬 사람들은 이른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이라고 하는 영국계 이주자들이었다. 이들 이외에 아메리칸 인디안과 흑인 노예들은 이 사회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런데 남북전쟁 이후 산업의 발달과 함께 유럽 이민이 급증했다. 처음에는 서구, 그 다음 북구, 남구, 동구에서 이민이 들어왔고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민의 봇물은 미국사회에 혼란을 가져왔다. 종래 WASP 사회에 큰 변화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이민을 제한하게 되었다. 1934년 이민할당법으로 인해 미국에서 무제한 이민시대가 끝났고 아시아 이민이 금지됐다. 그러나 2차대전 후 아시
아와 남미에서 새로운 이민 러시가 이루어지면서 1960년대에 이민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합법이민자들과 이보다 더 많은 불법이민자들이 아시아와 중남미, 특히 중남미에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과거 WASP 중심의 미국에서 유럽 이민자들은 미국사회에 쉽게 동화하여 동질의 미국인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사회와 문화에 용광로(Melting Pot)이론이 나왔다. 그 후 중남미와 아시아 이민이 많아지면서 이 이론이 「샐러드 보울」 이론으로 바뀌었다. 각 민족이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잘 섞인 샐러드 보울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백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재시 잭슨 목사가 선거캠페인에서 들고 나왔던 구호처럼 「무지개」 이론으로 바뀌었다. 서로 섞이지는 않으면서도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는 말이다.

현재 1200만에 달하는 불법체류자 중 멕시코인이 절반을 넘는 620만이고 다른 중남미를 합쳐 히스패닉이 전체의 3분의 2가 넘는 870만이다. 미국에서 히스패닉의 인구는 이미 흑인을 넘어섰고 오는 2050년경에는 히스패닉이 전인구의 4분의 1이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반대로 현재 3분의 2인 백인은 2분의 1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지난 해 LA 시장 선거에서 멕시코계 시장이 당선되었을 때 멕시코가 지난 1846년 전쟁에서 미국에 빼앗겼던 캘리포니아주를 되찾았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이와 같은 이민 추세, 특히 불체자의 유입 사태로 볼 때 미국은 이민자들을 동화시킬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사회로 변모해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반이민 정서가 강력히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민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지만 의회와 행정부,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곳에서도 묘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민문제와 불체자 문제는 백인과 비백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미국인의 일자리와 저임금 노동력 등 서로 상충되는 문제들과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불체자의 발생은 강력하게 막더라도 지금 미국내에 있는 불체자들을 무조건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니 절차를 거쳐서 구제하는 방향으로 가락을 잡아야 마땅할 것이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불체자 문제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불체자 자신들이나 그런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업계에서는 불체자 사면을 원할 것이고 안정된 미국사회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체자 억제에 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발전을 바라볼 때 불체자 사면
은 이루어져야 한다. 상원에서 심의중인 사오이 법안이 불충분하기는 해도 이런 취지에 가장 부합하고 있다. 우리가 이 법안 통과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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