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풍요로운 은퇴생활

2006-03-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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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식(치과의사)

신문을 읽다 보면 젊었을 땐 잘 보이지도 않던 ‘은퇴’라는 글자가 요즈음은 주먹만큼 큰 글자로 부각되어 보이는건 아마도 내가 그만큼 은퇴 적령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을 만나면 으례히 “은퇴 준비’가 단연 첫째로 꼽히는 화두이다.
언젠가 한국일보 경제란에 게재되었던 <젊어 수입있을 때 많이 적립해 두게> 라는 기사에 의하면 은퇴자들의 2003년 평균소득이 3만6,000달러, 42%가 2만5,000달러, 1/4(25%)가 1만5,000달러란다. 문제는 이만한 돈으로는 후회를 하는, 생활고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 생활고를 면치 못하는가? 지출이 많기 때문이다. 씀씀이가 없는 기본적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모기지와 유틸리티 비용은 기본인데도 그 비중이 전체 수입을 통째로 삼킬 것 같은 위협 속에서 정들었던 집을 팔고 콘도나 아파트로들 줄여가는 걸 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뉴저지만
해도 맨하탄에 비하면 무척 조용한 곳이지만 부쩍 늘어난 차량의 통행,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개스는 집 앞 화단 손질을 멉추게 한다. 숨을 쉬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숨을 쉰다는 일은 인간이 살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데 이것을 방해받는다는 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문명의 발달은 여러가지 편리한 기계를 발명했지만 이 발달한 문명이 반대로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보다 더 신형의 차를, 더 빠른 컴퓨터를,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을 소유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는 투 잡을 마다않고 열심히 일들
을 한다. 소유는 했지만 그걸 즐길 시간이 없는 것도 왕왕 있는 일이다.
소음과 먼지, 또 경쟁으로 스트레스 쌓이는 도시를 떠나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생활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자연환경의 월등함은 물론, 택스가 현재의 1/10도 안되는 곳이 시골생활에서는 가능하다. 어쩜 이건 홀가분한 Silver Age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환경임을 아는 것에도 불구하고 탈문명(?)을 망설이는 이유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심심하고 외롭다는 것과 내가 일하면 돈이 얼마인데... 하는 수입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는
게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사실 도시에 산다고 왕래를 많이 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사람과 우울증 환자는 인간이 밀집해 있는 도시 속에 더 많다고 하니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독하고 우울한 사람은 나를 몰입할 수 있는 건전한 취미거리를 찾아보자. 나는 친구들 왈, 음악이 마려운 사람이란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지만 숨 죽이고 앉아서 몇 시간씩 음악을 감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 인내심을 발견했다. 그런데 재작년 집 한 구석에 먼지가 수북
히 쌓인 수채화 도구를 다시 꺼내 들었다. 88년 처음 시작하곤 한 해도 채 못하고 처박아 둔 것이었다.
그 때는 잘 그리겠다는 욕심이 지나쳐(실력은 안되고) 스트레스가 되었었는데 지금은 쓰다 남은 마닐라 폴더를 잘라서 카드를 그려 만든다. 아직은 턱없이 미숙한 그림이지만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얻어지는 성취감이 쏠쏠하다. 실력이 없으니까 잘 그려 어떻게 해보겠다는 야망이나 욕
망은 아예 접어두고 취미삼아, 기분 좋겠다고 하는 작은 일에서 몇 시간씩 몰입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니 효과는 만점인 셈이다.지금은 그림이 치졸해도 자꾸 그려보면 향상되지 않겠는가?

운동도, 음악도, 각자 자신의 취미를 재발견해서 은퇴를 위해 준비해 두자. 은퇴도 연습이 필요하다.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은퇴 후 때쯤에는 즐기면서 할 만큼 잘 할 수 있다. 함께 할 벗이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먹거리는 유기농 방법으로 내가 직접 재배할 작정이다. 유기농 방법이라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살충제나 제초제를 쓰지 않는 퇴비 의존식의 농사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더 많은 여가를 창출해 주었다. 그러나 이 많아진 여유 때문에 인간은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이 남는 시간을 써야 할런지에 대한 대안이 궁색한 것이다. 그래서 찾게되는 것이 내가 하는 것 대신에 손쉬운 남의 공연을 보는 것이다.
편리를 위해 발명한 기계화, 자동화, 전산화 같은 것들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고 혹사당하는 우리 인간들이 이런 것들에게서 자유로와질 수 있는 대안으로 자연에 가깝게 사는 시골 생활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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