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폭탄주와 슬라이스

2006-03-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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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원(취재1부 차장)

요즘 한국에서는 한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과 국무총리의 골프 파문 소식이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비록 두 사건이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 당파적 싸움으로 전락하고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냥 묻어둘 수 없는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
모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을 놓고 일부에서는 “밤늦게까지 남자들과 술을 마시며 자리를 같이한 여기자도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골프파문과 관련해서는 “만약 삼일절에 골프 대신 등산을 갔다면 문제가 됐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두 의견 모두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권위가 바닥에서 기고 있는 무질서한 한국사회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추행 사건이나 삼일절 골프파문은 어떻게 봐도 두 당사자가 잘못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요즘 한국의 추세로 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결론을 ‘단순 무식’하고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쪽저쪽 측면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된’ 행동들이다.여기자가 밤늦게까지 공직자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그 기자의 몸을 더듬는 행위는 해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


아무리 대한민국이 자유의 나라라 하지만 삼일절에 골프를 치는 이 나라의 국무총리는 과연 한국 사람이 맞나? 한국의 국회에는 ‘폭소 클럽’과 ‘조폭 클럽’이 있다고 한다. 코미디나 양아치 조직을 좋아하는 의원들의 모임은 결코 아니다. ‘폭소 클럽’은 폭탄주 소탕의 약자이며 ‘조폭 클럽’은 조용히 폭탄주를 마시는 의원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가히 폭소를 자아내는 한국 정치인들의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류사회에서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권위이다.
한 나라를 이끄는 정부의 권위가 없어지거나 약해지면 그 나라의 질서는 파괴되기 마련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무시한 채 갈팡질팡 해매는 한국 사회의 오늘날이 잘못 제조된 폭탄주만큼이나 쓰고 힘차게 휘둘렀지만 슬라이스가 나 오른쪽 숲속으로 빠져버린 골프공만큼이나 허무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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