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명의 꽃이 지던 날

2006-03-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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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지금도 이라크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종파로 찢어지고 유혈극의 내전으로 이어진 이라
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거친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충혈된 눈으로 특파원
들의 불꽃 튀기는 현지 보도는 매일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다.
2003년 4월 7일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에 미군이 진입하였고 하늘을 치솟는 불기둥, 검은 연기
로 덮힌 하늘과 무너지고 파괴된 건물들을 텔레비전 화면에 보도하던 그 날의 숨막히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AP통신은 미군과 연합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던 날, 이라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4300
년 전의 고대 제국의 아카아디언(akkadian)왕의 조각이 성난 시민들에 의해서 귀가 잘리고 수
염이 깎이고 목이 떨어졌다.
같은 날, 사담 후세인의 동상도 함께 쓰러졌다고 톱 기사로 보도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왕조를 상징하는 왕의 조각과 사담 후세인의 동상은 같은 날 비운의 운명을 함께 맞이한 것이
다.
어느 미국병사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군림해 있던 거대한 사담 후세인 동상의 목을 밧줄로
묶어 땅으로 끌어내리는 장면은 온세계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던 역사적 숨가쁜 순간이었다.
이라크인들은 쓰러진 독재자의 동상을 시내로 끌고다니며 자유와 민주주의 구호를 외치며 환호
와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티그리스-유프라데스강 사이 고대문명의 산실이며 문명의 발상지였던 이라크는 무너졌다. 우리
옛말에 못된 자식이 조상 망신, 패가망신 시킨다는 말이 생각난다. 국가의 통치자와 그 후예들
이 눈부신 고대 건축의 왕국과 문화 유적들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또한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를 진입하던 날, 집중 폭격으로 무법지대로 변한 바그다드 도시에 위치한 박물관이 이성을 잃은 이라크 시민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그들은 전시된 유물을 마구 때려부수고 훔쳐 달아났다. 깨지고 산산조각이 난 유물들이 파편처럼 건물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도난당한 유물들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밀수꾼들의 손에 헐값으로 넘어가 세계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국가의 문화재를 자기들 손으로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박물관 직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바그다드에 있는 이라크 국립 박물관은 이라크의 5만점의 문화재, 유적이 소장되어 있던 고적 유물들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세계 수준의 박물관이다.
7000년 이상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의 유물들이 고색이 창연한 기나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단 48시간 내에 사라진 것이다.


기원전 약 2000년 혹은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갈대 펜으로 쐐기 모양으로 점토판에 조각해서 사용했던 설형문자 점토판, 장사거래에 쓰였던 기하학 점토판 정교한 장식품, 조각들이 소실되었다. 설형문자는 인류 최초로 사용한 활자문화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약 3300 BC경 스메르인들이 만든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순금으로 장식된 현악기 하프도 소실되었다. 아마도 고대의 여인들의 섬세한 손가락으로 그들의 애환이 담긴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였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다녀왔다. 고대 문명의 여러 제국, 스메르, 아시리아,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의 눈부신 문명의 꽃을 피웠던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고대인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 하였다. 인류문명의 발자취와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아까운 목숨들을 앗아가고 또 매일 사라지는 이라크전쟁의 악몽은 계속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파괴, 그리고 재건과 부흥으로 쇠고리처럼 연결된 역동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전쟁은 깊은 상처와 흉터를 남긴다.
이라크에서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수많은 고대 문명의 유물들이 사라지던 날은 찬란한 고대 인류문명의 꽃들이 떨어지던 날이다. 고대 유물들은 다시는 재생시킬 수 없는 인류 공동의 문화재산이다.그 날은 세계 문화인들과 고고학자들이 경악과 슬픔에 빠졌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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