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무원 살아남기

2006-03-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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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뉴욕시 교육국 학부모 코디네이터)

3년 전 평생 하던 보석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공무원이 된 것은 뉴욕시 교육국 역사상 처음으로 학부모 코디네이터라는 새 직책이 생긴데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정부기관에서 일하면 조직력과 행정력, 그 외 많은 것을 배울 좋은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급료지만 나의 의료보험이 우리 가족 모두를 커버하고 자녀들이 학교에 재학하는 한 23살까지 혜택이 부여되는 것도 매력적인 부분이었다.딸들이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항상 학교에 참여했고 구정날 혼자 한복 입고 잔칫집에서 한국음식 주문배달해서 교사를 대접하고, 아리랑 부르고 한 것이 P.S. 209 초등학교에서 구정행사가 학교 전체가 축하하는 행사로 발전되는 계기가 됐다.

학부모의 참여도가 낮았던 시절, 지금 근무하고 있는 JHS 189 중학교 학부모 회장을 하게 됐다. 큰 딸 사라가 라과디아 하이스쿨에 입학했을 때 첫 소집일 학부모회 활동경력을 기입하라고 해서 중학교에서 학부모 회장을 한 것을 기입했더니 학부모 대표로 인사를 하게 됐고, 입후보 등
록해 백인부모들이 많은 라과디아 예술고등학교에서 5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안면부지의 4,500명 부모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투표로 스쿨 리더십 팀의 9학년 학부모 대표로 맨하탄의 학부모 활동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짜장면 먹으러 나오라는 소리 듣고 식사하러 갔다가 갑자기 뉴욕한인학부모회 회장이 된 것은 교장, 교감, 학부모회장들이 모두 모였던 모임에서 용감히 발표하던 나를 지켜본 전 부회장 레이첼 윤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루어져 부족하지만 2년을 봉사하는 기회도 있었다. 이것이 좋은 인상을 주게 됐다.
11년 동안 성인 대학에서 어른들께 영어를 가르친 것도 나중에 이런 기회가 올 것을 대비해서 공중연설에 대한 훈련을 하나님이 시킨 것인줄 알게 됐다.
채용된 후 처음에는 같이 밥 먹을 동료도 없었지만 긍정적인 태도와 용감한 발표력으로 주위에 사람들이 붙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이 시작되자 처음 생긴 직책에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정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아주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어느 날, 교사노조의 책임교사의 초대로 멋도 모르고 몇번 회의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희생양이 되는 결과가 생겼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혀를 깨물었던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교문 앞에서 그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그 사람 코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따샤! 너 내가 나이스하다고 나를 미팅에 들어오라고 하고서 자꾸 나를 몰아세우면 너를 확! 받아버리든지, 태권도로 묵사발 만들어 버릴거야” 하고 학교 앞이라 크게 떠들 수는 없고 조용하지만 살벌한 어조로 얘기했다.
너무 놀란 그 사람은 말을 잃었고 나는 한 번 더 “야! 조심해” 하고 무시하듯 지나치고 몇달 동안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간취급하지 않았다.
한번은 한국학생이 무단 조퇴를 하도 해 셀폰을 걸어 설득하고 추운 날 30분 가량을 학교 밖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려 교실로 다시 데리고 들어왔는데 유대인 교사가 이런 학생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서 교실 문을 닫아버리고 들어갔다.
뒤도 안 보고 교장실로 가서 항의하려는데 문이 다시 열리며 학생을 받아들인다고 했고 그 교사는 수업이 끝난 후 내 사무실로 와서 사과했다.

3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입지를 구축했고 말단이고 새로 생긴 직책이지만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자기 실력을 위해 공부하고 인내하고 최선을 다하면 인정받게 되고 한인사회의 미래와 더 나아가서 자녀들의 앞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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