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희망을 다짐하는 남국의 한 소녀

2006-03-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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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옥(전 고교 역사교사)

아내의 가까운 동창들과 다녀온 겨울여행은 그 곳 기후를 즐기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필자에게는 약혼 40주년이라는 숨은 뜻이 있었다.
가난에 위축돼 있던 소년시절, 미국은 성공을 약속해 줄 수 있는 땅으로 믿었고 그곳으로의 여행은 소망이었다. 시궁창 냄새 풍기는 내 살던 청계천 판자집을 찾아 위안을 주던 한 여고생과 대학을 함께 졸업하던 날, 서로가 도미를 다짐하고 헤어진 것이 40년 전이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했었으니 꿈만 같다.
피곤한 몸으로 여행길에서 돌아온 동행자들은 지금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름다운 골프장 풍경을? 혹은 절벽 밑으로 밀려오는 푸른 바다물결을 생각할까? 아니면 하늘이 내려앉은 듯 더 가까이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일까? 또 아니면 들판에 방목된 가축이나 호텔 내의 풍요한 먹
거리와 대조되는 그들의 가난한 모습일까? 하지만 나는 호텔 식당 모퉁이에서 만난 이 교정을 하고 있는 한 소녀를 생각한다.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잠시 멈추어질 무렵, 건물 모퉁이를 돌아설 때 그녀는 출근길 비에 흠뻑 젖은 옷을 말리느라 힘들게 틀어짜고 있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그 소녀에 다가서기를 꺼릴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웬디’라는 이름의 소녀의 얘기는 금새 고교시절 내 교복을 생각나게
했다.
입학 때 사입은 한 벌밖에 없는 교복이 젖었을 때 솥뚜껑 위에 올려놓고 마르기를 기다리고 또 젖기를 거듭해 헐어버릴 때쯤 나를 찾던 그 소녀는 지금의 아내가 되어 며칠 후면 또다른 휴양지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옛날처럼.
그녀를 좀 더 알고싶은 호기심은 여분으로 새 블루진을 사준다는 약속의 유도로 그녀가 사는 집을 방문해 볼 기회를 갖게 됐다. 쓰레기가 널려진 좁은 길을 따라 막힌 골목에 서있는 판자집은 집이라기 보다 외양간에 가까웠다. 문을 열고 들여다 본 내부는 더욱 심해서 쥐가 드나드는 흔적이 보였고 얼굴을 들면 하늘이 보여 낮인데도 모기가 극성으로 달려들었다.그나마도 경제적으로 부모를 돕기 위해 룸메이트를 한단다. 그토록 가난한 소녀가 이 교정을 하고 있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얘기를 듣는 참을성이 필요했다.

금방 들은 영어 한마디를 잊지 않는 총명한 이 소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약속이 있었다. 좀 더 예뻐지려 없는 돈 마련해 이 교정을 시작했을 때 애인은 미국으로 훌쩍 떠났고, 행복에 좀 더 가까이 서 있는 새여인을 만나 결혼을 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 배신에 대한 증오의
말 한마디 없는 착한 소녀가 옛 애인이 있는 미국땅을 밟는 것이 소원이라 할 때 4년을 참고 기다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웬디! 희망을 잃지 마. 그렇지 않고 밝은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너희 나라에서 동계 올림픽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부지런히 영어를 배우면 내일의 너의 태양은 새롭게 떠오를거야!아내가 도착한 휴양지를 향해 떠나면서 포옹이 끝날 때 쯤 미래의 희망을 다짐하는 그녀의 손
에는 적지않은 액수의 돈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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