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품바’ 연대기

2006-02-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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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칼럼니스트)

한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연극 ‘품바’가 뉴욕을 비롯한 미동부 지역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품바’는 귀에 익숙한 각설이타령과 민요가락 등이 어우러진 희가극이지만, 수집과 편집을 거쳐서 창의적으로 구성된 작품이기 때문에 원작자인 김시라씨가 저작권을 갖고있는 작품이다.
1981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이래 현재까지 25년간 4500회 이상 공연을 해서 단일작품 최장기 연속공연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 플러싱 코리아빌리지 공연을 통해서 20년만에 품바를 다시 관람했다. 뉴욕에서 만난 품바는 단순히 웃고 즐기는 코메디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품바’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패러디와 페이소스와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작’으로 길이 남을 우리시대의 대표적 무대예술로서 손색이 없었다.

품바의 슬픈 몸짓은 일제시대에 시작되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서 근현대까지 이어진다. 거지 품바는 유일한 재산목록인 깡통에 생존을 걸었지만 공짜동냥은 아니다. 대가 조로 부르는 각종 ‘각설이 타령’을 통해서 당대의 기층문화를 통박한다. 한시대의 상황과 인정, 계절 묘사
와 풍속 등이 한마당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칼러사진 보다도 더 정확하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친일파, 일본인들에 구걸하면서 수탈 당하는 식민지인의 아픔이 거지춤을 통해서 묘사되고, 이어지는 해방의 감격도 잠시 뿐,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여전한 가난 뿐이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인생에게도 청춘과 사랑을 찾아오는 법, 그러나 그것도 잠시 6 25 전쟁 통에 처와 딸을 잃어버리고 다시 거지 신세가 된다. 다만 경력이 붙어서 주인공은 거지 대장이 된다. 실존 인물이었던 거지 대장 ‘천장근의 일대기’라고 하지만 사실 ‘품바’는 한민족 현대사의 축약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조선 말기의 실정과 일제침략과 수탈, 동족상잔의 전쟁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신생 대한민국은 가진 것이 ‘빈깡통‘ 밖에 없었던 것이 반세기 전에
실재상황이었다.

의(依) 식(食) 주(住)가 인간의 필수 생활요소라고 볼 때, 거지는 완벽하게 이 삼대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다소간에 차이는 있지만 근대사에 있어서 서민들은 이러한 기본권들을 대부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래도 하나도 없는 거지보다는 낫다는 자조감이 서민들의 유일한 위로였을지 모른다.
‘품바’는 단순한 거지광대 사설이 아니라 그 깊이에는 밥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한 현실긍정과 더불어 뿌리깊은 저항을 통해서 밟히지만 포기하지 않는 민초들의 저력이 있고, 그 두 가지를 다시금 어우러 내는 유머감각이 있다. 바로 이것이 5천년 동안 조그만 한반도를 끌어안고 버텨
온 한민족의 무의식적 힘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급성장해서 그야말로 ‘거지깡통에 장미꽃이 피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2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섰고, 연간수출 1억달러 목표는 오늘날 2000억 달러를 초과하고 있다. 그 저변에 생존을 위해 ‘품바 품바’ 입나팔을 불던 각설이 정신이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목을 맬 힘이 있으면 땅이라도 파라” “생손가락으로 나무뚫기”가 한 시대의 구호였다.
내친김에 더 얘기하자면 오늘날 누더기를 걸치고 깡통을 든 헐벗은 ‘거지’는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노숙자들도 의관은 멀쩡하고, 구호급식도 타먹을 수 있다.

오늘날 당면한 한국 경제구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택정책에 있다. 꿩 잡는게 매라던가 여하튼 20세기 독재정권은 기본권 중에서 의복과 식량의 문제는 해결했다. 그러나 민주정부가 들어선지 10여년이 지났어도 주택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민의 기본권인 주택(아파트)을 상
품화해서는 안 된다. 수출품목도 아닌 내수용인데 정부와 기업이 여전히 담합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아파트원가 공개’를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상적인 시장경제에서 원가가 공개되지 않는 상품은 있을 수 없다.
평생 일하고도 집 한 채 없는 ‘품바’가 사라져야 한다. 주택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는 사람이 한국의 ‘영웅’이 될 것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아 한마당 질펀한 꿈이었구나! 의식주를 기본권을 박탈당했던 국민 ‘품바’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전설로 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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