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우는 삶의 지혜

2006-02-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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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이드

컴퓨터를 열면 매일 같이 수 십 개의 정크 메일이 들어 있다.

그걸 다 열다가는 골치가 아파서 어떻게 살겠는가. 그래서 얼핏 보아 나와 연관이 되는 것들만 남겨두고 불필요한 것들은 다 지워버린다. 그래야 스트레스도 덜 받고 하루 일과도 순조롭게 시작된다.

그리고 시간이 바빠 다 보지 못하는 메일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유머나 에피소드, 건강 상식 같은 것들만 저장해 두었다가 주말 같은 때에 다시 꺼내 보곤 한다.


이를 테면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메일은 생활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다보면 남한테 덕이 되는 사람이 있고 남한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사람을 잘 가려내 지우면서(delete) 사는 것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덕이 되지 않는 사람을 가까이서 접하다 보면 금전적, 또는 정신적, 아니면 말로든 이모저모로 상처를 받기가 십상이다.

한인들 중에는 여러 민족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인종이 한국인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될수록 한인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고 가능한 한인이 없는 곳에 멀리 떨어져 살고 싶어 한다. 그만큼 한인들이 두렵고 무섭다는 이야기다. 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물론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을 하는 경우는 있으나 한국인들처럼 뒤통수를 치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끼리끼리 편을 지어 당을 만들고 남을 모함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의리는 물론, 위 아래도 모르고 은혜를 받고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일들이 한인사회에서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교인 중에도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남 보기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남의 험담과 이간질을 밥 먹듯이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돈을 빌리고도 떼어먹거나 몇 년씩 안주다가도 어쩌다 주게 되면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나오는, 그래서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이들에게 이런 생활은 어쩌다 한번이 아니고 상습적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되는 것인지, 이들은 남 보기에 더 떳떳하고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특별히 교회에서 사람들이 더 상처를 받는 까닭은 알고 보니 필요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는 옳고 그름이 다 말소됨인지 사안의 내용이 그 때마다 필요한대로 달리 해석이 되는 예가 적지 않다. 어떤 때는 문제가 거론되면 ‘교회법에 따라야 된다’ 하고 또 같은 사안이라도 반대의 경우에는 ‘은혜로 해야 된다’는 식으로 유리하게 풀이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소한의 자존심마저도 허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이 됐으면 무조건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이 아니라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인 실상이 일부 교회 내 실세들에 의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의외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매우 심각하다.

그 것은 왜일까? 교회를 포함한 이민사회는 온갖 인종이 다 모이듯, 한국에서 온갖 일을 하던 사람들이 다 한 곳에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굳이 그 이유를 밝히자면 우리나라에서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학연이고 혈연, 지연을 따지는 데도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런 관계가 되면 이미 오랜 깊이가 생겨 서로를 알고 또 끼리끼리 어울려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을 사귀면 자기의 배경은 대부분 일체 감추기 때문에 한국에서 무얼 하다 왔는지 잘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보여지는 얼굴만 가지고 서로 미소 지으며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얘기를 하다 보면 한국에 금송아지 없는 사람이 없고, 이민 온 사람 중에 고관대작 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한국에서 국화빵 장사, 또는 행상했다는 사람들은 구경할래야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 전부 다 잘난 사람들 뿐이다.

그 이유는 이들이 모두 예수를 믿든, 절에 가든 욕심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회만 있으면 비양심적으로 나오고 자기가 높아지기 위해 남을 헐뜯고 모함하고 하는 것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 한 이민생활은 풍요롭지 못할 것이다. 지워야 할 사람, 멀리 두어야 할 사람을 가려내는 눈은 일종의 혜안이다. ‘버릴 것’과 ‘지금 당장 실현할 것’을 철저하게 지켰던 아이젠하워의 삶의 지혜가 부럽기만 하다.

여주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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