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유

2006-02-21 (화)
크게 작게
베이사이드 하이스쿨 운동장은 내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아내와 함께 걷는 산책 코스이다.

그 곳에서 나는 애견을 거느린 한 백인여인을 종종 만나곤 한다. 여인은 늘 잔디 위에 무릎을 구부린채 애견에 입을 맞춘 다음 한 손에 들었던 플라스틱 비행접시를 하늘 높이 던진다.

개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접시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받아 물고 주인의 곁으로 달려온다.


잘 했다는 듯 애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난 여인은 또다시 접시를 하늘 높이 던진다.

이같은 동작이 수없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주인의 명령을 하늘과 같이 알고 민첩한 동작으로 복종하는 충견다운 모습을 보곤 했다.

이상한 것은 개는 힘이 들고 피곤해도 사람처럼 불평하지 아니한다.

사람처럼 요령을 부리거나 “이제 그만 하시죠” 하고 자기의 소견을 피력하는 법도 없다.

천번 만번을 던져도 목숨이 있는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사람과 동물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 옛날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430년만에 지도자 모세를 따라서 애굽을 탈출하게 되는데, 그들은 40년 동안 불평불만을 일삼다가 모두 광야에서 죽어버린다.


여기에서 사람에게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창조주가 어찌 사람에게 동물과 같이 순종하는 성품을 주지 아니하고 불순종의 성품의 사람으로 창조하였을까?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필연적으로 내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이 ‘자유의지’라는 단어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1525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Born Slaves’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Free Will)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 말은 인간이 절대주권자 앞에서 스스로 선할 수도 없을 뿐더러 궁극적인 구원을 성취할 수 없음을 신학적으로 검증했을 뿐이고 신은 언제나 인간이 자유하기를 원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소유함으로 동물과 크게 구별된다. 신은 인간답게 살게 하려고 종종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험한다.

아담은 이 시험에서 낙방한 최초의 실격자가 된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의 사건을 옛날, 아주 먼 옛날 ‘에덴’에서 있었던 하나의 신화로 여긴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가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만나는 절대주권자의 윤리강령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유한다. 무엇을 택하든지 그것은 내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내 몫이다.

나는 언제나 선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바르게 선택한다는 일은 너무나도 중대한 사한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순간적인 결단으로 흥하고 망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도 실은 나의 결단에서 좌우된다. 나의 결단이 나를 지옥으로 전락시키는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왜? 어찌해서 신은 인간에게 이토록 위험한 자유의지를 부여하였을까? 차라리 동물들이었다면 모두 길들여서 한 마리의 낙오자도 없이 순하게 몰고 천국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을 자유케 했다. 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유케 했을까?

그 해답은 너무도 명백하다. 자유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는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성역’이 있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영역이다. 조물주도 그 영역을 범하지 아니한다. 그 때문에 신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왔고 인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까지 사람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인간을 향한 애절한 구애의 종교가 바로 기독교의 사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자유에 있다. 인간은 사랑을 느낄 때 자유하다. 그래서 신이 너희들을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현자는 부탁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두말 할 것 없이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바로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바른 정치는 언제나 인권을 옹호한다. 민주주의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를 만끽하는 통치체제이다.

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말이 있다.

교회란 사람을 모아 어떤 목적달성을 위해서 훈련하는 훈련장이기에 앞서서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키는 자유인의 모임이어야 한다.

신은 십자가에서 또다른 계명을 준 것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인간을 영원히 자유케 했다. 가정도 그러하다.

결혼이란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전혀 다른 자유인이 만나 함께 살아가는 슬기를 체득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 소중한 자유는 어디에서 왔을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운기(목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