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극의 위험

2006-02-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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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사회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나 시장경제 국가에서 어렵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가끔 독재자가 그리울 때가 있다. 생활의 평등이 무너지고 빈부의 경제가 극도로 편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업시대 이전의 사회는 극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평민으로 구성이 되어있어 극소수의 지주에 대한 수직관계의 적대감보다는 다수의 평민은 횡적 평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시대가 열리고 자유주의가 팽창하자 그에 대한 여유를 즐기면서도 사회는 양극화란 불행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높은 자와 낮은 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비싼 차와 싼 차, 호화주택과 빈민촌, 노동자와 경영자 등등, 극이란 차거운 비수를 감추고 있는 위험이다.


북으로 자꾸 가면 그 끝이 극으로 끝이 나고, 남으로 자꾸 가면 그 끝도 극으로 끝이 난다. 말해서 북극과 남극, 가까울 수 없는 먼 거리다.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춥다는 것이다.

전기에는 +와 -가 있다. 이 두 극을 마찰하면 불꽃이 튄다. 전기 고문이라든가 감전사는 이 두 극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사회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한다.

과연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는가? 나부터 먼저 잘 살고, 나부터 먼저 출세하고, 나부터 먼저 명예를 얻고, 나부터 먼저 앞서 나가고 싶어하는 이기심은 없는가?

연회장에 가 하얀 상보가 화려한 밥상 가에 앉으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섞여 있다.

아는 사람이야 알만큼 알고 있으니 별 문제가 없지만 모르는 사람은 무엇인가 자꾸 내보이고 싶어하고 무엇인가 장신구를 이용해서라도 자꾸 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부러움이나 칭찬을 해주고 싶은 마음보다는 역겨운 생각과 함께 반감이 솟는다.

시장경제를 부추기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의 위험을 해소하는 방법이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다시 온다고 말씀하였다. 기독교인은 그 말을 믿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마음이 왜 간절할까?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게 살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삼년여를 하늘의 말씀을 전파하고 다닐 때 “내가 왜 걸어 다니냐, 어디 좋은 차 없느냐? 밥상에 차린 음식이 이게 뭐냐, 어디 진수성찬은 없느냐? 아니 내가 왜 이런 데에서 자야 하느냐, 어디 아랫목 따스한 일급호텔은 없느냐? 아니 내가 왜 혼자 자야 하느냐, 어디 예쁜 아가씨 하나 없느냐?” 했다면 지금 다시 오겠다는 예수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베드로마저도 “이쪽 사정도 별로 좋지 않고 우리도 먹고 살기 바쁘니 그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사람은 높아져야 하고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계급사회에서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높은 자, 있는 자, 많이 배운 자, 호화주택에서 사는 자, 좋은 차를 타는 자, 회사를 경영하는 자, 나라를 경영하는 자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눈을 뜨면 보일 것이고 생각하면 길이 보일 것이다.

양극화되는 사회의 위험을 청소하는 길은 높은 자나 있는 자가 키를 줄여 낮아져서 베풀고 나누는 배려의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해 보는 것이다.

높은 자가 높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으면 올려다보기는 하겠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있는 자가 있는 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자기만을 위해서 쓰고 있으면 부러움은 얻겠지만 존경을 받지는 못한다. 높은 자, 있는 자, 경영하는 자가 낮아질 때 인간사회는 평등해진다.

낮은 자나 없는 자는 소외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격려의 대상이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있는
자가 낮아지고, 경영하는 자가 낮아져서 인간사회가 평등해지면 그 때로부터 평화가 오고, 평화가 오면 평안을 얻는다. 독재가가 미울 때란 평안을 누리고 있을 때다.

김윤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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