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폭설에 핀 인정

2006-02-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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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 영 <논설위원>

지난 주말 60년만에 강타한 대폭설로 뉴욕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설경은 좋았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눈에서 차를 빼내기 위해 온 뉴욕시민은 한바탕 진땀을 빼야 했다. 내 경우는 다행히 눈 치우기를 막 끝낸 이웃 미국인 부부를 만나 그들이 가진 두 개의 삽 중 하나를 빌려 눈을 치우려는데 막상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 부부가 또 하나의 삽을 들고 와서 파킹장에 세워둔 내 차 주변을 말끔히 치워주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과는 평소 만나면 고작해야 서로 ‘하이’ ‘굿모닝’한 것이 고작인데 그들은 이렇게 어려운 때 나를 구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아마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웃이라고 인사하며 지낸 덕을 아주 톡톡히 본 셈이다. 이들을 평소 그
냥 지나치며 지냈다면 과연 그들이 내게 이런 친절을 베풀었을까?
오늘날 우리 시대는 문화가 발달할수록 사람과의 관계가 무 접촉으로 날로 삭막해져 가고 있다. 이제는 사람들이 인간간 접촉 보다는 될수록 리모콘, 셀폰, 이메일, 인터넷 등 기계에 의존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활은 편리하고 신속해지긴 했지만 인간간의 관계는 더욱 썰렁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나 주위 사람과 어우러지고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하고 나누며 지내기보다는 개인주의로 가는 경향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그 결과 친구나 친지, 이웃간에도 서로 만나기를 꺼려하고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는 추세다.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서로 얼굴을 대하고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면서 지낼 수 있는 자리가 쉽게 마련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힘없는 노인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무 접촉에서 오는 정(情)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과 적막감을 이기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과거에는 어린 아기들이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업히고 안기고 입맞춤을 받으면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 부모들을 보면 아이들을 가까이서 접촉하기 보다는 남의 손에 맡겨 기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어린 아이 경우 2세까지 만져주거나 사랑해 주지 않으면 자폐증이나 신경쇄약에 걸리는 예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의 접촉은 중요한 것이다. 오 헨리의 한 단편 소설에서 보면 집에 강도가 침입, 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하자 주인이 “한 손이 신경통이라 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강도가 “나도 신경통”이라며 아픔을 공유하고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그 주인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은 서로의 아픔, 상처가 하나의 접촉점을 만들어 강도의 마음까지도 돌리게 한 하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가정생활, 이민생활에서도 서로의 아픔과 상처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접촉이란 그만큼 힘이 있어 사람의 마음이나 상처, 아픔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미 최대 스포츠인 풋볼경기에서 하인즈 워드가 대스타로 떠오른 것도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깊은 사랑의 접촉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와 접촉하며 자라는데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로 서로 접촉하면서 살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접촉이 약해지니까 문제가 많이 생겨 이를 위한 벼라 별 행사나 모임, 상술 까지
도 등장하고 있다. 발렌타인 데이도 일종의 그런 것이 아닐까.
시대가 접촉하지 않는 추세로 가다 보니 사람들은 오히려 접촉해주기를 원한다. 접촉을 많이 해주는 아기가 건강하듯 자녀들과 부모, 그리고 친지나 이웃 간에도 관심을 갖고 서로 가까이 접촉할 때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보면 청소년들이 부모의 관심 밖에서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인들도 혼자 기거하며 사람과의 접촉을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웃끼리도 단절된 상태에서 길에서나 하다못해 엘리레베이터에서도 만나면 서로 소 닭 보듯 하거나 아니면 말을 시킬까봐 오히려 고개를 돌리는 한인도 없지 않다.

이들은 누가 가까이 올새라, 누가 뭐 좀 달랠 새라 담을 쌓고 철저히 외부와 단절한 채 생활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이웃 간에 서로 조그만 어려움이라도 같이 나누면서 지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를 위해 그 날 열심히 삽질하던 그 미국인 부부의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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