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신의 부재 의식

2006-02-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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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홍 권 (동부제일교회 목사)

어머니는 열두명 자녀를 낳으셨다. “열둘”하면 많은 것 같아 보이지만 “한 다즌(One Doze
n)”밖에 되지 않았다. 실제로 열둘을 기르시는 것이 매우 경제적일 수 있었다. 먹을 것은 모두
도매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고, 옷 같은 것은 큰형님 것과 큰누님 것만 사면 줄줄이 불하하였
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 형제중 넷째인데 내가 장성하여 취직해서 받은 월급으로 새 옷을 사
입기까지는 양복이든 내복이든 새 것이라고는 입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가장 많게는 네명이 같은 학교를 다녔다. 운동회를 할 때는 어머니가
각자에게 도시락을 싸주기 보다 점심시간에 어느 나무 밑에 모이도록 약속하고 점심을 함지에
담아 약속장소로 가정부에게 이어서 가져와 함께 먹곤 했다. 운동회가 있던 날 저녁, 어머니가
하신 말씀 때문에 가족들 모두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유, 세상에 아이들도 어찌 그리 많
은지, 그 아이들을 누가 다 낳았는지 몰라...”
우리 형제 자매들은 공부하기 위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살았다. 종조모께서
버스를 타고 관광을 위한 부산 나들이를 하셨다. 내가 작은 할머니께 “할머니, 오시는데 고생
많으셨지요?”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할머니께서 “얘야, 말도 말아라. 사람들도 어찌 그리 많
은지, 밟혀 죽는 줄 알았다. 할 일도 많을터인데 뭣하러 그렇게 모두가 나다니는지 내사 참말로
알 수가 없더라”고 하셨다.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분은 우리 어머니였다. 그리고 아무 할일 없이 나들이 한 분은 내 종조
모였다. 그러나 그 분들은 자신들은 쏙 빼놓으시고 남만을 말씀하셨다. 이것을 ‘자신의 부재의
식’이라 한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갔다 온 사람이 “사람들이 구더기같이 많더라”고 표현했을 때, 그 구더기
중에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말한 것이 된다.
어떤 믿음 좋은 아가씨가 안 믿는 가정에 시집을 갔다. 시어머니께 열심히 전도하여 마침내 시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시어머니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문답이 있는
전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이 누구 죄로 죽으
셨느냐고 물으시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대답하세요” 드디어 시어머니는 당회 앞에서 문
답을 받게 되었다. 목사님이 몇가지를 물었으나 하나도 대답을 못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다.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죽으셨나요?” 시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쉽
지요.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사도직 수행의 초기에는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고전15:9), 중기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했으며(엡3:8), 말기에는 “죄인 중
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다.(딤전1:15) 그는 신앙이 점점 성숙되어감에 따라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존재 실체를 더 확실하게 깨닫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에게로 점점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존재 실체를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 사람
도 그리스도 앞으로 가까이 가게 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다.
요즈음 한국에는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교육자들이나 언론인들이나 과학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
까지 “내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음을 보게 된다. “내 탓”이라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남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격려할 수 있게 된다.
목사인 나만이라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괴수니라”고 자신의 존재 실체를 깨닫고 “내 탓”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할 터인데, 모전자전인지는 몰라도 나에게서도 “자신의
부재의식”이 이따금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고소를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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