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아름다운 세상

2006-01-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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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신문을 보면 요즈음은 어두운 소식들이 주를 이룬다.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미담거리 보다는 누가 누구를 죽였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니, 혹은 무엇이 가짜니, 진짜니 하는 어두운 소식
들만 가득하다. 그만큼 지금 세상은 어디를 보아도 혼탁하고 어지럽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편히 쉬고 살 수 있는 공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나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만
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청도에 가면 운문사라는 절이 있다. 그 곳은 특징이 기와가 낮고, 또 그 솔밭 행렬을 따라가면 돌담이 다른 곳과 달리 매우 얕다. 사람들은 이런 건물을 보면 보통 지붕도 높아야 되고, 담도 높아야 좋은 걸로 생각한다. 그러나 낮은 기와나 낮은 돌담을 보면 웬지 편안하고 아
름다워 보인다. 낮다는 것은 그 보다도 우선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사람을 봐도 지위가 높은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중압감을 느끼면서 은연중에 움츠리고 겁을 먹게 된다. 그러나 낮은 사람, 다시 얘기해서 보통 사람을 보면 우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
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첫 발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그 자체가 담이 돼버린다. 높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은 평소에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얼마 전과 같이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그런 아름다운 숲도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낮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바다도 마찬가지로 바라보고 서 있으면 사실은 그 자체는 굉장히 두려운 존재이나 우리에게는 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 것은 바로 낮은데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는 것은 나 보다 낮아있는 것을 볼 때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나 보다 높은 것을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나 보다 낮은 것만 보아야 세상이 아름다운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그런 좋은 기분도 있지만 그러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데에서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보다는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아무리 자연이 참 아름답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을 놓고도 정원
사가 왜 화초를 가꾸고 화단을 가꾸는가. 같은 화단이라도 규모 있게 잘 정리해서 화단을 꾸미는 정원사의 노력과 꿈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보다는 어느 땐 더 아름다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정원사가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가족의 손과 발이 되는 정원사가
있다. 그 정원사는 바로 어머니다. 또 사회에서는 어떤 직함이나 감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노력하는 사람이 정원사다.

가족 관계에서 왜 유독 어머니가 힘을 쓰고 애를 쓰는가. 가정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땀 흘리고 노력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다는 노력해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게 더 아름답기 때문에 또 아름다운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그만 단체에서 일원이 되어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가는 사람이다. 뒷 켠에서 팔짱끼고 남 다 해놓으면 잘했느니, 못했느니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생각 외에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아름답게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남은 죽어라 길 닦고 자기는 그 닦아진 길 위를 반짝 반짝 구두신고 편안하게 걸어가는 사람이다.

아름다움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지 않고 내가 일구어 놓지 않으면 아름다움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앞에 세상은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받으려면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사랑만 받으려고 하면 누가 사랑하는가.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때 그도 나를 사랑해 주는 법이다. 아름다운 세상은 내가 아름답게 만들겠다 생각할 때, 그리고 스스로가 낮아져 남을 위해 노력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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