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러기 아빠

2006-01-1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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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퀸즈형사법원 통역)

기러기 아빠란 한국에서 조기 유학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새로 생긴 가족 형태다. 아이들과 아내를 모두 유학으로 보내놓고 홀로 남은 홀아비를 말한다. 이런 기러기 아빠들의 생활이 사회문제가 될 만큼 지금 한국에서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한 40대의 기러기 아빠는 혼자 살고 있는 원룸에서 소주를 마시다 쓰러져 세상을 등졌고 또 다
른 기러기 아빠는 자신의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식이다.이처럼 기러기 아빠들이 겪는 고충이 이미 그 정상적인 인내의 한도를 넘었다고 할 만큼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금 한국 사회가 영어를 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태로 바뀌었고 생존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영어 조기교육에 힘쓰고 있는 현상은 이해할 수 있다.그 중 하나가 조기유학 바람이다. 지난해 우리 나라에서 유학으로 떠난 초중고생만 1만5,000여
명이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영어의 구사가 중요한 성공 요인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조기유학을 통해서 영어 공부를 시키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 한번 짚고 넘어야 할 생각이 든다. 조기유학은 당연히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반작용이 동시에 있게 마련이다.영어는 지금 영어권 나라들의 언어라는 지위를 넘어서 이제는 국제어로 자리잡힌 현실이니 지
금처럼 글로벌 시대에 영어를 구사할 수 없다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영어라는 언어는 워낙 우리 말과는 구조가 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배우기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일찍 시작하지 않으면 일생을 배워도 완벽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아주 부담스런 언어이긴 하다. 그래서 초, 중등학생 때 유학을 보내어 일찍 영어에 익숙하도록 하는 효과는 확실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조기 영어 교육이라는 목적 때문에 조기유학을 보내는데 따로는 엄청난 반작용을 망각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초 중등학생이라면 아직 우리 말도 채 바로 배우기 전의 연령이다. 이들이 일찍 유학 간 나라에 아주 이민을 간다면 별문제다. 하지만 앞으로 어차피 한
국사회에서 활동할 인재로 자라게 하려면 우리 말이 우선 능숙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영어를 일찍부터 배워야 완벽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우리 말 역시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배운 말이 아니면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완벽한 한국어는
구사할 수 없게 되고 또한 한국적인 사회에 적응하는 인격 형성에도 차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조기 유학시켜서 일찍 영어에 능통한 자녀를 기르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언어나 정상적으로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아이로 자라게 하는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나는 이미 이곳에서 영어에 능통한데 한국어나 한국에 관해서는 멍청해 보이는 많은 한국인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 이래서 지금과 같은 조기유학의 폐해로 앞으로 이런 멍청이 한국인이 더 많이 생겨날 것을 몹시 우려하고 있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뉴욕주 법원 행정처에서는 많은 한국어 법정통역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막상 좋은 통역관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법정에서 필요로 하는 통역관은 우선적으로 재판 당사자인 한국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창한 영어도 중요하지만 유창한 한국어가 더 중요하
다. 특히 젊은층의 지원자 가운데에는 오히려 한국어를 더 공부해야 할 사람을 많이 본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법정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현역의 한국어 통역들은 모두가 60대의 연령층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성년생활을 하고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오히려 한국어에
서둘러 법정통역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영어가 전부가 아니다. 또한 유학만이 영어공부의 해결이 아니다. 조기유학이라는 열풍 때문에
가정이 망가지는 사회현상은 어느모로나 바보같은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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