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금파티의 밤을 다녀와서

2006-01-02 (월)
크게 작게
박민자(의사)

지난 연말 , 모 병원의 모금파티에 참석하였다.
호텔 입구에 도착하니 승용차들이 미끄러지듯 속속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는 신사 숙녀들, 역시 밍크코트는 떡 벌어진 어깨와 위풍당당한 체격이 큰 미국인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발 끝까지 내려오는 밍크코트가 부담스럽고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이제는 아이들의 학령기도 지나고 대부분은 아이들도 결혼 시켰으니 화제는 주로 누구는 심장수술을 받았고, 그 누구는 암 투병 중, 혹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느니 하는 어두운 소식들이다. 낙엽처럼 한 둘 떨어지는 어둡고 쓸쓸한 이야기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우울한 소식도 쏟아져 흐르는 음악 속에 묻혀버린다. 키가 작고 뚱뚱한 중년 여자는 구두를 벗어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맨발로 온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춤을 춘다. “춤을 추자. 그래서 온 몸의 비게덩어리를 태워버리자” 소리치면서 나와 그
녀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 녀는 한눈을 살짝 감아 보인다.
그리고 연말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부딪치게 되는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한 쌍의 커플을 나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남자는 머리가 벗겨지고 안경을 끼고 있었고 수염을 길렀으니 완벽한 변신이었다. 그에게 온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여자도 낯설
었다. 가슴이 깊이 파인 속살이 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새로 결혼한 셋째 부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첫째 부인은 나의 남편과 산부인과 병동 분만실에서 함께 지낸 후배 동료이다. 산부인과 레지던트로 한 병동에 일하면서 환상적인 커플로 스캔들을 뿌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은 결혼으로 이어졌으나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혼한다. 다시 재혼을 하고 또다시 삐걱거린다
는 소문 이 난 이후 만나지 못하였다.
또 다른 여러 커플을 만났는데 이혼 후 동겨 여인, 또는 여자친구들을 소개했다. 아마도 잔인한
세월은 이렇게 흠집을 내고 할퀴고 흘러가는 것일까? 마치 배터리를 새로 갈아 끼워 재충전하
듯 인생의 파트너를 바꾸며 이혼과 재혼은 쉽게 이어진다. 동경부동식이란 부부가 함께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농사를 지었으나 수확을 거둘 때는 같이 먹지 못했다는 고사가 생각난다.
영화 ‘노트북’은 2004년, 닉 카사베테(Nick Cassavetes)감독이 만든 부부애를 그린 작품이
다. 거울같은 호수의 수면위로 백조들이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장면과 함께 서정시와 같은 부부
의 길고 긴 생애의 이야기다.
1940년 미국 남부 시골에서 어느 여름, 목공소에서 일하는 노아(Noah)와 상류층 소녀(Allie)는 10대의 연인들로 운명적인 첫사랑의 만남이 시작되어 80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생애의 동반자가 된다.

뜨거운 열정이 타오르던 젊은 시절의 격렬한 시간들과 현재의 노부부로 빛이 발한 칙칙하게 어두운 시간들이 이동하고 움직이면서 화면이 바뀐다.
치매를 앓고있는 아내가 살고있는 양로원에서 노인이 된 남편 노아는 아내인 알리에게 그들이 함께 살아온 기나긴 시간들의 일생의 기록이 담긴 노트북의 이야기들을 매일 읽어준다. 이미 지난 날들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아내와 얼마 남지않은 시간을 젊음과 열정이 타버린 가슴에
다시 모닥불을 피운다.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편히 잠든 사람들처럼 양로원에서 숨을 함께 거둔다. 그들은 긴 일생을 함께 살아온 것처럼 같은 순간에 함께 떠난다.

노부부는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깝게 다가온 피할 수 없는 주검에 조용히 순응하는 상징적인 표현의 장면이었다. 부부애를 승화시킨 영화이다.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어 드릴 때까지 농부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부부의 애정도 끝없는 땀 흘리며 가꾸는 작업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해 보며 새해를 시작한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