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일보와 나의 아름다운 인연

2005-12-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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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커네티컷)

1967년 1월 우리가 하트포드, 커네티컷주에 정착하였을 때 한국인이 별로 없었고 유학생 수 명, 그리고 의사 몇 명과 이민온 교포가 10여 가정 살고 있었다. 낯설고 물 선 이곳 미국의 생활은 외로웠고 태평양 저 멀리에 있는 고향을 그리면서 눈물을 흘린 날이 많았다. 때를 같이 하여
미주 한국일보가 발간되면서 고향 소식을 전해주어 무척 반가웠고 기뻤다. 나는 한국에서 쓴 ‘장명수 기자의 칼럼’을 즐겨 읽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38년이란 오랜 세월의 미국 생활을 나와 같이 하면서 초창기에 한국일보는 여러가지로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믿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포사회를 위하여 헌신적인 사회활동을 하였고, 그 보람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여 오늘의 뉴욕 한국일보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당시 고향 소식만을 갈망하면서 생을 살던 우리 교포사회가 경제적으로 안위한 삶을 누리는 안정된 사회를 이루면서 교회의 확장은 물론 정서적인 문화생활을 하게 되면서 한국일보는 뉴욕을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뉴저지주와 커네티컷주의 교포들을 위한 각종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교포들로 하여금 생의 관심을 미주생활에 더욱 집착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한 그 공로를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9.11 테러사건이 있은 후 미국이 테러 소탕을 위한 이라크전쟁을 시도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불란서 정부에 대한 나의 노함은 2,000여명의 젊은 군인들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노르만디를 상륙하여 나치 점령하에 있던 나라를 해방시킨 그 은혜를 망각한 쉬락 대통령이 너무나 미워서
“노르만디와 인천, 그리고 미국’이라는 제목의 오피니언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글을 더 쓸 생각은 없었으나 ‘오피니언 칼럼’의 담당자가 계속하여 쓸 수 있도록 권면해 준 것을 감사드린다.지난 11월 3일자에 쓴 ‘모차르트 대령님의 은혜’는 이름을 기억 못하는 대령님을 그리면서 옛날에 입은 그 은혜를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며, 그 분이 혹시 미국 하늘 아래 그 어느 곳에 살고 계시기를 소원하였던 것이다. 뜻밖에 ‘모차르트 대령님’의 친구로 가깝게 지내시던 박기식 선생님께서 내 글을 읽으시고
한국일보를 통하여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전화를 통해 그 옛날 대구시 향촌동에 있던 ‘녹향 음악감상실’과 1985년도에 작고하셨다는 그 대령님의 소식을 전해주어 눈물겹도록 슬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차르트 대령님이 이름모를 무명이 아닌 이신덕 준장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고마웠고, 그 분의 음악을 옛날보다 더 즐겁게 들으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한국일보의 내 글을 읽고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친구의 여동생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우리의 거처를 확인한 후 작년 12월에 세상을 떠난 오빠의 소식을 전해주어 슬프기는 하나 무척 반가웠다. 뉴저지주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은 내 글을 읽고 이름을 기억하면서 한국일보를 통해 나를 찾아주어 56년만에 무척 반가운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근 40년 전 한국에서 살면서 ‘Fire Fly’클럽에서 영어회화 공부를 같이 한 길선생은 작년에 우리 내외를 소개한 한국일보의 기사를 읽고 내 아내의 이름 ‘고명도’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전화를 주신 것은 너무나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지난 11월 18일자 ‘흐뭇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제로 내 글 ‘모차르트 대령님의 은혜’를 읽은 후 오피니언 칼럼에 글을 쓴 허 송 목사님의 ‘좋은 글’이라는 찬사에 감사를 드리며 나는 한국일보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감사하는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글을 쓰면서 나는 한국일보를 통한 생의 아름다운 일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를 고히 간직할 것이다. 한국일보에 글을 쓰는 여러분들도 이런 아름다운 인연을 맺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름다운 생을 영위하시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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