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해를 보내며

2005-12-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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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또 이렇게 한 해가 저문다. 연초에 올해는 부디 조용하고 평화로운 한 해가 되어주기를 바랐건만 결과적 현상은 반대로 유난히도 시끄러운 해였다.
지구촌 곳곳에, 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곳만 골라서 하듯이 쓰나미, 허리케인, 지진과 가뭄,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삶을 흐트려 놓은데다 전쟁, 테러, 사회폭동 등의 인위적인 파괴까지 겹쳐 삶을 더 불안하고 힘겹게 하더니 그것도 부족해서 한국인들에게는 ‘황우석 쇼크’ 하나를 더 얹어주어 감당해낼 수 없는 무게에 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으로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20세기에 살고 간 중국의 철학자 ‘임어당’은 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갈 때면 “연초에 계획한 일들의 3분의 1은 실천한 것 같고, 3분의 1은 실행을 못 했고, 나머지 3분의 1은 무엇이었든 기억 조차 나지 않는다”고 실토했었다.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이맘 때가 되면 나는 그의 사상을 한번씩 반추해 본다.내가 그를 존경하는 것은 학문적인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쉬운 말로 하는 ‘편안함’과 그의 ‘소탈함’ 때문인 것 같다.나는 또 이 때가 되면 ‘한국편’과 ‘미국편’의 두 편으로 나뉘어진 삶 중 후편인 미국에서
의 삶은 내 기억 속에 녹화된 비디오를 제자리로 감아서 처음부터 살펴본다. 그러면 “저 때는 저렇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어야 되는데…”에서부터 “저 때는 내가 저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되는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NG(No Good)가 발견된다. 그려면 곧이어 영화와 TV 연속극을 촬영할 시에 배우나 탤런트들에게 무제한의 반복 기회가 주어지는 것같은 그런 특혜는 아니더라도 단 한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저런 NG들은 깔끔히 지울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의 황우석 교수도 자기의 삶을 2년 전으로만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세계인들이 모두 관중인 앞에서 저렇게 엄청난 NG는 남기지 않았을텐데 하고 땅을 치고 통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평소에 단련된 자기의 페이스대로만 뛰었으면 우승했을지도 모를 마라토너가 연도에서 열광해주는 관중들의 박수소리에 우쭐해져 더 빨리 뛰다가 중도에서 주저앉고 마는 우(愚)를 범할 개연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마 황교수 경우도 그에게 너무나 열광하는 ‘국민의 성원’과 가시적인 성과로 빨리 보답해 보려는 ‘조급함’이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이런 참담한 지경에 도달한 지도 모른다.

더구나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깨진 항아리의 물은 도로 퍼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선 민족의 저력을 생각하며 빨리 털고 일어나서 이번 사태가 한국민들에게 ‘빨리빨리 문화’가 결코 능사가 아님을 일깨워 주고, 이성은 깊은 곳에 묻어두고 감성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제를 압축성장시켰다면 국민의식은 압축성장이 불가능한 건지 등을 반성해 보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다.

국가와 민족적으로는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피해였지만 짓눌린 국민 각자에게는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더 크게 다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유명함’에서 보다는 ‘평범함’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권면으로 조그만 위안을 해주는 것 같다.며칠 후면 새해다. 2006년 한 해 동안 각자의 삶을 기록할 새 비디오(Blank Tape)를 우리는 받는다. 나는 이번에는 NG를 하나도 내지 않는 멋진 비디오를 만들 것을 생각하며 설레임 속에 새해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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