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명예 졸업장

2005-12-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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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2005년도 거의 다 갔다. 일년이란 단위의 시간은 거의 다 가고, 몇 날 지나면 우리에게는 한 해를 마감하는 졸업할 일만 남았다. 누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이수한 명예 졸업장을 들고 새 해를 향하여 걸어갈까?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각종 모임이 여기 저기에서 꽃을 피운다. 좋았던 싫었던 짊어지고 왓던 한 해를 졸업하면서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며 그간의 노고와 여담을 섞은 위안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연말의 모임은 따뜻하고 낯익은 얼굴들은 자주 자주 보았는데도 또 반갑다.한 해를 살면서, 더욱이 처자식과 함께 외지에서 살면서 보낸 한 해 동안의 여러가지 일들이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잊어버리기에는 가슴이 저리다. 기분 좋게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산 사람도 많겠지만 어떤 사람은 한 해를 살면서 지독한 절망의 맛을 보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주 슬픈 맛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연말에 만나면 오히려 그렇지 않은 듯 신나게 마시고 떠들며 놀다가 놓기 싫은 악수를 풀고 헤어지는데, 그 헤어지는 모습이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는 현실생활예술의 한 모습이었다. 인간의 본래 심성이 이런 것인 것을!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밥상이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밥상보다 따스한 것은 하루를 졸업하는 서운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정월의 색동옷 보다도 동짓달의 허름한 옷이 더 따스하게 보이는 것은 일년을 졸업하는 서운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졸업을 겪으면서 산다. 어머니의 따뜻한 뱃속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면 졸업을 해야 할 일이 줄을 서 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
교와 대학을 또 졸업한다. 유아시절을 졸업하면 곧 소년소녀 시절을 졸업하게 되고, 청년기를 졸업하면 어느새 장년기를 졸업하게 된다. 이 얼마 되지 않는 삶의 질곡을 달리면서 많은 꿈을 품고 많은 양의 일을 한다. 성공이란 단어에 매달려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인지 조차 가늠해
볼 여유도 없이 하루를 졸업하고 한달을 졸업하고 그리고 한 해를 졸업한다.

지나가는 시간을 밀물과 같아 금방 지나가고 오는 시간은 썰물과 같아 천천히 오는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간 것이 주는 보이지 않는 밋밋한 졸업장을 들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바램일 것이다. 내 모교인 용산고등학교 연말 모임에서 ‘조 용 근’ 동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는 순서가 있었다. 학교를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일찍 떠나게 된 그는 다니던 학교에서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이 오십이 넘도록 그 바램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면서 지내다가 드디어 서울 모교에서 온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명예 졸업장, 신선한 감동이었다. 그의 바램이 명예 졸업장을 받게 해 준 것이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 사업자는 사업으로서, 학문을 하는 자는 학문으로서, 한 해를 졸업하는 이 자리에 내가 지금 명예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연말이 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에게 바램이 있었고, 그 바램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 했다면 결과의 성공 여부는 그만두더라도 명예의 졸업자일 것이고, 새로 오는 새해를 바라보며 새로운 바램이 있다면 그 또한 명예의 졸업자가 될 것이다.눈을 뜨면 보이고, 귀를 열면 들릴 것이다. 해마다 신혼마차의 흥분 같은 마음으로 바램을 가지고 새해를 맞고, 그 힘으로 밤을 휘젓는 등대가 되어 파도치는 밤바다를 뛴다면 인생을 졸업하는 그 어느 날에 명예 졸업장이 주어질 것이다.
등대는 뱃길만 밝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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