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넓어지는 선택의 폭

2005-12-10 (토)
크게 작게
허병렬(교육가)

‘여기 포도와 바나나가 있어요. 이 중에서 하나만 가지세요.’ ‘여기 DVD 플레이어와 MP3 플레이어가 있어요. 둘 중에서 하나만 고르세요.’ 이런 경우에는 약간의 불만이 있지만 쉽게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과일이 있다거나, 각종 장난감이 있다거나, 많은 책들이 있다거나, 색색의 옷이 있다거나 할 때 이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불평거리가 되기 쉽다. 왜 하필이면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선택 조차 쉽지 않은데, 어떤 ‘가치’의 선택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가치관의 다양성에 있다. 각자가 말하는 ‘가치’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어느 하나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그 다양한 가치를 다 허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양한 가치관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기준이 있는 선택일 수 밖에 없다.얼마나 큰 양의 자유를 누리느냐는, 얼마나 넓은 선택의 광장을 가지고 있느냐 라고 해석할 수 있다. 때로는 죽느냐, 사느냐 할만큼 중요한 일 중에서 하나만 선택을 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쪽이 더 값진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까닭은 드넓은 선택의 광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직업 선택을 생각해 보자. 예전과 지금은 직업의 종류가 적은 데서 많게 되었다. 현재는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없는 직업은 새롭게 창출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또 직업 선택의 기준이 다양하다. 수입을 생각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분담하는 일과 시간, 일하는 장소나 부수적인 조건 등을 고려해서 이를 선택한다.배우자 선택은 어떤가. 물론 사랑을 바탕으로 하겠지만 가계·건강·외모·학력·능력·장래성 등 하나도 예사로 넘기지 않는 세태가 되었다. 때로는 동성끼리도 배우자를 선택하기 때문에 결혼의 폭이 넓어져서 혼란 상황을 이룬다.

교육기관 선택의 폭도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교육기관은 교육과정에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여 특수학교로서의 면목을 갖추고 학생을 유치한다. 그것도 국내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를 향하여 손짓을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수준에서도 영재교육·특수 재능교육 등을 행하여 교육 내용을 다채롭게 시행하고 있다. 초등교에서도 처음부터 2중 언어로 교육하거나 공립학교이면서 사립같은 차터스쿨이 있는가 하면 홈스쿨링도 있다.거주국의 선택도 절차를 밟으면 가능하게 되었다. 태어난 나라에서 일생을 마쳐야만 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나라를 선택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겠다.

자녀에 대하여도 선택권이 있는가.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자녀의 수효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남아 선호의 기운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원정 출산까지 합세하면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선택권을 넓히려는 노력이 보인다.사용 언어에도 선택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거주국의 선택과 관련이 있지만 사회와의 연결을 위하여 사용 언어도 선택할 필요성이 생긴다. 더 나아가 세계화의 물결에 따라 한 가지 언어에만 능숙한 사람들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필요에 따른 선택 역시 자기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일상 생활에 이용되는 기구·소비 물품 등은 광고를 전투적으로 펴는 소비문화의 파도 속에서 현명한 선택이 요구된다.이렇듯 나날의 생활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강요 당하는 현대인은 건강한 ‘가치 판단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가치 판단계는 개성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자연과 조화할 수 있는 것이면 좋을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록 바람직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지는 것이 자연 현상이어서 이를 즐길 수 밖에 없다.반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 할 경우라면 우리의 삶이 초라할 것이 아닌가. 풍부하고 다양한 혜택을 많이 받을수록 거기에 따르는 크고 작은 노력을 쏟아야 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