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러분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5-12-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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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뉴욕가정상담소 아웃리치 코디네이터)

지난 10월초 뉴욕시는 발레리라는 4살된 여자 아이의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한밤중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온 이웃에 의해 발견된 발레리는 맨발인 채 거리에 버려져 있었다. 발레리는 “엄마 어딨어? 엄마!” 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곧바로 ACS(Administration for Children Services) 로 넘겨졌다.

발레리는 자신이 “아빠”라고 부르는 엄마의 남자친구가 차로 내려주고 자신만 남겨둔 채 떠났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발레리의 이야기는 더욱 미궁속에 빠지게 되었다. 과연 발레리가 찾는 엄마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것인가였다. 더욱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아무도 아이에 대한 실종신고를 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발레리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뉴스에 방영되었으며, 결국 뉴스를 본 발레리의 삼촌과 연락이 되었다.


이야기의 끝은 더욱 큰 충격을 전해주었다. 발레리의 엄마는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되었고, 아이를 어찌할 바 몰랐던 그는 결국 발레리를 길에 내버린 것이다. 발레리의 이야기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만큼 허술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딘가에도 도움을 호소할 수 없었던 발레리와 발레리의 엄마는 결국 사회의 미아가 된채 떠돌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뉴욕가정상담소는 16년째 한인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가족 구성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상담소의 24시간 핫라인 전화를 받으면서 느끼는 것은 전화를 거는 한사람, 한사람의 지혜와 용기를 실감하게 된다는 점이다. 발레리의 엄마와 같이 사회의 시스템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고 있다 하더라도 섣불리 연락하지 못했을 때 결국 자신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그대로 흘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 정서상 상담소에 전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가족 혹은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다기 보다 가족의 문제를 가족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방식이다. 그러나 상담소에서 부모와 아이, 또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서로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된다. 또한 폭력이라는 굴레 안에서 살다가 새로운 삶을 찾거나 혹은 새롭게 그 안에서 적응하는 방식을 찾아가는 분들도 많이 만나보았다.

상담소를 홍보하는 사람으로 상담소라는 하나의 시스템을 끊임없이 알림으로서 우리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발레리가 겪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상담소가 한인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상담소를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전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램이다.

현재 뉴욕가정상담소는 24시간 핫라인 전화가 있다. 5명의 카운셀러와 13주간의 자원봉사자 훈련을 마치고 몇년째 상담전화를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24시간 핫라인을 이끌어 가고 있다. 가정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 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부부문제, 자녀문제, 배우자 문제등)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드리고 있다. 자원봉사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때로는 전화가 안오는 것이 더 좋은 일인 것 같다며 우스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이는 24시간 전화가 필요 없을 만큼 편안한 가정이 우리 사회에 많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바꾸어 이야기 하면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과정 안에 상담소와 같은 사회기관이 조그마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상담원과 자원봉사자들은 핫라인 전화 (718-460-3800)를 통해 사회의 한부분에 작은 기여를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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