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 길을 걸으면서

2005-11-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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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밤이 깊어서야 하루 일을 내려놓고 잠이 드는 아내의 시름처럼 가을잎은 떨어진다. 아내는 시시각각 보태지는 나이의 무게가 힘에 벅찬 줄도 모르고 아직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어린 손녀의 뒤를 씻어주거나, 동네 공원 놀이터에 가서 재미있는 놀이에 덧보태어 살 빼는 운동도 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가랑잎 무수히 떨어지는 산동네 가을 길.
이 길을 걸으면, 먼저 이 길을 간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도 이 길은 내게 항상 새로운 길이다.

아침이면 나가고 저녁이면 들어오는 똑같은 출퇴근 길. 봄, 여름, 가을, 겨울, 무수한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생활을 들고 이 길을 지나갔지만 내가 가는 내 길은 항상 새롭다. 항상 새롭기에 지루하게 생겨먹은 일년 동안을 지루한 줄 모르고 이 길을 다닌다.아침이면 보이는 자동차 속의 운전하는 사람들, 예전에 내가 하던 대로다. 한손에 커피컵을 들
고 한손으로 운전하고 거기에다 틈틈히 손전화를 하고 바쁘다. 젊었다. 그들의 삶이 푸르고 싱싱하다. 고장이 한번도 나보지 않은 듯한 마주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나는 부러워 한다. 그들의 얼굴은 꿈으로 반질반질하고 광채가 난다. 그리고 그저 앞을 보고 가기만 하면 된다는 자신
감만 보인다. 그들은 가을 속의 봄이다.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누구나 꿈이 있었다. 개꿈이기도 했고 헛꿈이기도 했던 꿈이 나에게도 있었지만 그런 꿈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나의 얼굴도 꽤는 반질반질 했었겠지.


근사한 시를 쓰는 세기의 시인이 꿈이었다가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나 문우 선배들의 생활고를 보니 그 짓이 밥벌이와는 만리 거리라 그 길을 가다가 방향을 비틀어 버렸고, 석학 쯤 되어보려고 공부를 하다가 두뇌의 능력이 허락치 않아 반기를 휘날리며 두 손을 번쩍 들어버렸고, 가슴을 후비는 음악이 신비로워 음악이란 담장을 넘나들다 냄새만 맡고 그만 두었고, 재벌쯤 되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먹고 살만하니 그 짓도 게을러졌고 한국에서 권세 좀 부려보다가 그것도 바람같은 생각에 팽개쳐버리고 가족이 있는 미국땅으로 다시 들어와 버렸다.

심약에서 개꿈이 나오고 허기에서 헛꿈이 나온다지. 좋으면 했고 싫으면 버리면서 여기까지 왔다.가을이다. 푸르던 잎도 때가 되어 곱게 단풍이 들더니 이제는 떨어지는 일만 남은 가을이 됐다. 나이 들어 미국에서 가을을 맞고 미국에서 가을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을 해야 한다. 열 자식의 입에 발린 효자 소리 보다도 열배 스무배 효도하는 미국의 복지법과 복지시설, 미국을 위해서 공헌을 했던 아니했던 나이만 들면 형편에 따라 보살펴주는 미국, 누가 미국(美國)이란 이름을 지었는지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다.뉴욕의 가을은 아름답다. 어디를 가나 심술이 나도록 아름답다. 괜히 유럽의 알프스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버몬트주나 뉴햄프셔주, 메인주나 커네티컷주, 또한 우리가 사는 뉴욕주의 가을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단풍의 절경이다.

나이들어 걸어가는 인생 가을길, 뉴욕의 가을이나 아름다운 이름의 나라인 미국 만큼 아름다워져야 한다. 중독자도 아닌데 세상의 외로운 짐 혼자서 다 지고가는 사람처럼 낮이고 밤이고 소주병이나 까고, 별반 남아도는 기력도 없는 터에 몇잔 술에 취해서 가족들 앞에서 술냄새를 풍기거나,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붙잡고 시비나 거는 노년이 된다면 이 가을은 아름답지 못하다. 곱디고운 단풍의 색깔이 아니라 쩔어버린 회갈색의 잎새로 그저 바람에 휘날리거나 빗물에 젖어 지저분하고 허망하게 떨어질 뿐이다. 풍파를 스스로 이기면서 자란 나무들인데도 아무런 소리 없이 아름답게만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으면 가을이 아니고 아름답지 않으면 단풍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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