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살다보면 별일 다 있다”

2005-11-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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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도 있고 별일 다 있다” 국정원장을 지낸 2명의 측근이 불법도청사건으로 구속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DJ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세상을 살다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되고, 험한 꼴을 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
꼴을 본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DJ의 말이 바로 그런 말일 것이다.
DJ는 정권을 야당에게 넘겨주지 않고 노무현에게 주면 별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DJ나 노나 다 같은 좌파이기 때문이다. 초록이 동색이니 정책적으로 충실히 계승해 줄 뿐만 아니라 측근의 신변문제를 특별히 배려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후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북송금 특검에 이어 이번 불법도청사건에서 DJ를 봐주
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 같다.현 정권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과거의 정권을 비호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자기네의 입지 강화를 위해 과거 정권을 제물로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두환이 후계자로
내세운 노태우가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시켰고 노태우가 3당 통합으로 대통령을 만들어 준 YS가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더구나 좌익의 특징은 혁명과 개혁을 좋아하는 성향이므로 과거를 까뒤집어 무자비하게 파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과거 공산주의 세계에서 행해진 숙청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좌익세계에서 DJ가 노에게 기대를 걸었다면 그것은 오산일 수 밖에 없다.사람은 누구나 현직에 있다가 자리를 그만두면 정도 문제일 뿐 DJ와 같은 심정을 느끼게 된다. 현직에 있을 때는 그 나름대로 역할이 있고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어
떠받들어 준다. 그러나 현직을 그만두면 그런 영향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무시당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당하는 당사자의 서운함과 배신감, 모욕감은 당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처럼 높은 자리에서 큰 권력을 누린 사람일수록 이런 심정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조그만 마을의 면장도 평소에 ‘면장님, 면장님’ 하던 사람들이 면장을 그만두자 못본 체하면 서운할 수 밖에 없을텐데 하물며 한 나라를 쥐고 흔들던 대통령이 현직을 그만두었을 때 무시당하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독재권력으로 국민들을 벌벌 떨
게하고 측근들의 아부에 둘러싸였던 독재자의 경우 몰락 후 비참한 처지가 되었을 때 느끼는 심정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권력을 잃었을 때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참한 상황이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특히 독재자들은 장기집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그러나 ‘화무십일홍 권무십년’이란 말처럼 누구나 권력을 끝없이 누릴 수는 없다.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므로 내려온 후 안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경착륙이 아닌 연착륙으로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경착륙과 연착륙이란 말은 요즘 경제에서도 흔히 쓰이는데 인생사에서도 쓰기에 좋은 말인 것 같다. 공중을 나르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 활강을 하면서 바퀴가 먼저 땅에 닿아 연착륙을 하면 안전한 착륙이 된다. 반대로 갑자기 기체가 땅에 떨어져 충돌하는 경착륙을 하면 기체가 파괴되고 심지어는 폭발하여 인명까지 희생시키는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현직에서 내려올 때는 마치 산의 정상에서 조심스럽게 한 발 한발씩 내려오듯이 연착륙을 해야지 딴 생각에 팔려 발을 헛딛는 때에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경착륙을 하게 된다.

대통령의 퇴임 후를 보장해 주는 것은 결코 후계자가 아니다. 자기 스스로 연착륙하는 방법 뿐이다. 임기가 끝난 후 재임 중의 일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법에 어긋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국정을 처리하고 권력이양의 과정에서도 국민 앞에 겸허하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노대통령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대통령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우리 사회에서 회사의 사장이나 간부, 단체의 장 등 사소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잘 봐주라”고 하는 우스개 소리가 결코 우스개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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