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그러진 ‘언론의 자화상’

2005-11-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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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지금은 신문 제작의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있지만 필자는 과거 오랜 기간에 걸쳐 신문사의 편집국장, 편집인으로 제작 책임을 맡아 일을 했다. 기자들에게 취재를 시켜 기사를 만들게 하고 기사를 검토하여 취사선택, 신문지면을 꾸렸다. 때로는 좋은 인재를 채용하여 훌륭한 기자로 키우기도 했으나 때로는 자리를 물러나게 하는 몹쓸 짓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면서 기본명제로 삼은 것은 “신문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것, 신문을 위한 신문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신문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기자들이 기사를 쓴 후 이런 저런 부연설명을 하면 나는 그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기자는 기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구구한 사족이 필요 없이 기사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나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독자를 향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기사를 썼다고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기자의 사명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명감이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게를 하는 상인이나 사소하게 보이는 직업인들에게 모두 필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청과업을 하는 상인이 맛있는 과일과 야채를 신선하게 유지하여 소비자에게 판매했다면 그는 성실하게 사명을 다 한 것이다.


청소를 하는 사람이 구석구석까지 먼지를 깨끗하게 청소했다면 그것도 사명을 다 한 것이다. 신선한 청과를 유지하고 구석구석의 먼지를 청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고객, 즉 남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남을 위해 최선을 다 함으로써 결국 그 보상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이와 반대로 소비자와 고객이 바라는 일을 실제로 만족시키는데 열중하기 보다는 동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악선전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식당 주인이 손님들에게 다른 식당의 음식을 악평한다고 그 식당의 음식이 맛 없게 될까. 이 식당과 저 식당을 다녀본 손님들은 어느 식당의 음식이 좋은지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 악선전이 먹혀 들어가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악선전을 하는 식당주인의 인격만 떨어지고 끝내는 비즈니스에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흔히 언론을 제 4부라 하여 그 영향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고 사회의 목탁이니 정론이니 하여 진실과 정의에 투철한 사명의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론사들의 행태를 보면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사회의 목탁은 고사하고 누가 보고 들을까봐 걱정되는 글과 말이 난무하고 있다. 그것이 독자나 시청자, 청취자를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언론이 사회적 분열에 편승하여 패를 짓는가 하면 언론사끼리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으니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사회 속에서 대체로 신문이 보수의 편에, 그리고 TV방송이 진보의 편에 서서 정치투쟁에 못지않은 싸움을 하고 있다. 신문 중에서도 대체로 큰 신문은 보수쪽이고 소수 신문은 진보쪽에서 서로 비난전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부채질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사회의 가치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이 때 언론이 중심을 잡고 나라가 바로 나아가도록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언론사의 이해득실을 위해 시정잡배 수준의 싸움질을 마다하지 않으니 한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에서도 요즘 신문과 방송이 자기네 입장을 옹호하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기사와 방송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쓰나미 성금 지불이 8개월 지연되고 있다는 별로 천지개벽할 일도 아닌 기사가 왜 이렇게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번져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일로 신문이
도배가 되고 방송시간이 허비되는 것은 독자와 청취자에게 득이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자리와 그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기사나 프로그램이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필자는 어느 특정사를 지탄하거나 비난할 의도는 없다. 한국과 미국에서 37년째 언론사에 몸담아 온 한물이 간 고물 언론인이지만 언론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만은 하고 싶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일그러진 자화상 앞에서 반성하여 참된 언론의 모습을 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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