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는 반복되는가

2005-11-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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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옥 (플러싱)

친일파 명단이 나오고, 또 친일파 문제가 대두되니 과거사를 추궁 정리한다는 현 정치지도층이 6.25 때 남침한 김일성 정권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무수한 사람을 인민재판에 부치고 학살시킨 과거사는 말 한마디 없는 과거사 청산을 아무리 이해할라 해도 안된다. 그러면서 그 과거는 뛰어넘고 먼 과거사만 과거사로 본 386세대의 머리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위험스럽고 아슬아슬하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친일파 중에도 선각자가 있었고 애국과 민속정신을 고취시켰던 인물도 많았다. 일본이 청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나 조선반도가 두 전쟁에 휘말려들어 많은 희생을 입었으나 세계 속에 조선의 존재가 없었다. 국제정세에도 우둔했고 양반제도만이 지상주의였다. 일본은 구라파 각 나라와 손잡고 현대화 되어가며 조선을 수중에 넣을 야심이 강했던 정세도 잘 알지 못했고 대비책도 없었다.


일국의 왕비가 궁 내에서 외국인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민비가 출타 중이거나 다른 곳을 방문 도중도 아니고 깊은 궁중에서 일어났고, 잠들고 있던 중 일본 랑인패들에 의해 살해됐다. 이 사실이 민비 사후 7일 뒤인 1895년 10월 15일자 뉴욕 헤롤드지에 보도되었는데 사진도 실렸으나 사진은 하나의 상상화였다.
당시 고종은 세자와 같이 러시아 공관으로 임시 대피했던 사태까지 전개되었다. 오늘날 우리 대통령이 하기 좋아하는 말, “대통령 못해 먹겠다”라고 하나 그 당시의 국내 정세는 지금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당시 경운궁으로 이사했다. 모든 조선 정치는 외국공관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각종 반미 데모, 반일 데모가 연일 일어나니 우리 조국은 고립되어 가고 또 스스로 고립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김정일 집권에 두손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받아만 주면 만족감을 가지고 남쪽에서 안심하고 징치도 하고 출마도 할 수 있는 지경에 온 것은 현대판 ‘조공’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조셉어 백카의 책에 의하면 이북의 경제, 인민군 통치 등은 김정일 정권을 더욱 확고히 유지하고 강화시키는데 궁극의 목적이 있다고 그의 최고 호화하고 사치한 생활은 동서양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고 있다.

예를 몇가지 들어보면 미식 프로레슬링을 보고자 1,500달러를 지불해서 개인적으로 감상하는 것, 수입 고급 리무진 차가 100대나 개인향락용으로 별도 보관돼 있고 1만여종이 넘는 불란서 고급 와인이 준비되어 있고, 일식, 이태리, 불란서식 요리를 할 수 있는 쿡까지 있다고 한다. 김일성 동상 건립은 처음에는 금으로 했다. 1978년 9월 3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 등소평 주석이 국빈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안내받아 김일성 동상을 보고 한마디 한 것이 연고가 되어 그 동상의 금이 동으로 바뀌었다. 그 동상이 당시 8억5,100만달러를 투입해서 건립한 것을 알고 식량원조를 비롯하여 각종 원조를 중국으로부터 받으면서 이런 낭비를 하고 있다는 좋지 못한 말을 듣고 동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통일교를 앞세워 이태리로부터 외자도입을 했다. 자동차 생산공장을 남포에 세우고 ‘뻐꾸기’와 ‘휘파람’이란 두 종류의 자동차가 10만대 생산 규모였으나 첫 7,000대를 정부가 구입 후 댓가를 주지 않고 그 공장은 철수했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개성공단이 때를 만난 척 하고 현정권이 대업적을 이루었다고 소리 높이 외치고 있으나 외자도입에 몇차례 실패하고 난 후라서 그 결과를 참으로 주시해야 할 것이다.오늘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고종 시대의 우리나라와 다르다. 그 때는
참으로 존재 없는 나라였고 영감, 대감, 상감을 통치했던 통감부가 들어와도 속수무책이었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된다. 진보적인 통감부와 통감이 들어서서 우리 조국의 손 발을 묶고 입을 막는 제 2의 매국노와 민족 반역자가 다시 탄생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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