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한 알의 밀알

2005-11-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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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르고 싱싱하던 나뭇잎이 형형색색으로 물들면서 낙엽이 되고 있다. 여름에는 생전 안 떨어질 것 같이 보이던 나뭇잎이 가을이 되면서 단풍으로 변하고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나무가 많은 호수가나 산, 공원 같은 곳은 울긋불긋 저마다 달리 물든 단풍으로 눈이 부시고 수북히 쌓여 가는 낙엽들은 보는 이들에게 깊은 상념을 안겨준다.

‘단풍’ 하면 일년 사철 변하지 않는다는 상록수도 가을이 되면 거의 절반은 색깔이 노랗게 되면서 땅에 떨어진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변화요, 창조주의 섭리이다. 이런 대자연의 순환을 보면서 누군가는 ‘한 사람의 생애와 같다’고 말했던가. 인간의 생명체도 일단 세상에 태어났다 하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의 생명체란 다 그렇게 살다 가는데 사람들은 영원한 줄 알고 잠깐 왔다 가는 생을 싸우면서 물고 뜯고 야단이다. 하물며 하찮은 나뭇잎도 떨어지면 퇴비가 되어 다음에 태어날 나뭇잎을 위해 밑거름이 되어 주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살다가는 인간이 얼마다 허다한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순환하는 자연의 희생은 우리에게 인간답게 살다 내 한 몸 썩어져 ‘한 알의 밀 알이 되라’는 교훈을 가르친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 하나의 희생이 내 가족이나 내 주변, 그리고 내 이웃의 거름이 된다면 그 보다 더 값지고 귀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내 한 몸 썩어져 내 주변이 변화하고 사회가 변하고 또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그 생명을 통해 세상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면 그 보다 더 소중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 부(富)를 붙들고 움켜쥐고 권력이나 명예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는 옭아맸던 끄나풀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놓고 꽉 쥔 손을 펴고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응어리를 쓸어내릴 때도 되었다. 푸르던 나뭇잎이 가지 말라 붙잡는다고 떨어지지 않을 건가. 누래지고 빨개지고 하면서 떨어지듯 인간들도 아무리 붙들고 움켜줘도 결국은 다 놓고 가야 한다. 4계절의 변화대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다시 벌거벗은 나무가 되듯 인간도 이 세상에 나와 유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치면서 단풍처럼 갖가지 물이 들고 언젠가는 낙엽처럼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영원히 권력을 쥘 것 같던 독재자도,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자도 이슬처럼
사라졌고 스탈린이나 히틀러, 뭇소리니, 김일성 같은 절대적인 독재자도 별수 없이 하루 아침에 이슬로 죽어갔다. 이들은 모두 승승장구, 영원히 살 것 같았지만 바람과 온도에 견디지 못하고 나뭇잎이 낙하하듯 세상에서 다 멀어졌다. 이처럼 모든 생명은 영구히 살 수 없고 또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어서 썩어져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는 동안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게 살고, 더 많이 갖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생수명 70이요, 강건해야 80이라고, 언젠가는 창조주가 부르면 ‘아멘’ 하고 가야지 별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아무리 오래 살자고 보약을 먹어도 도리 없다. 짧은 인생 장수해
야 백년인데 덮어놓고 오래 산다는 것만이 자랑스러운 게 아니다. 노랗거나 빨갛거나 나뭇잎처럼 예쁜 색의 물이 들어 훗날 떨어져 거름이 된다면 이 보다 더 값지고 가치 있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후세를 위해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살아야지 아무 것도 남길 것이 없이 산다면 살았으되 헛 산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단풍을 보고 ‘아름답다’ ‘예쁘다’ 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낙엽을 보면서 ‘인생무상’ 아니면 ‘슬픔’이나 ‘고독’ ‘쓸쓸함’을 연상한다. 이런 감정은 어쩌면 남 보다 더 가진 사람,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권력이나 명예, 부는 쥐면 쥘수록 더 큰 욕망을 부르기 때문에 항상 허전하고 외로운 게 사실이다.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지구상엔 어딜 가도 지상낙원은 없을 것이다. 단풍이 불타듯 절정을 이루는 늦가을,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나는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또 후세를 위해 무엇이 될 것
인가? 곰곰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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