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독교인부터 마음의 문을 열자

2005-11-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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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보스턴)

“묻노니 오늘 대한의 주인되는 이가 몇명이나 됩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이다. 이 말을 제창해 보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많은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무질서와 도덕 불감증에서 진정한 주인 찾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본국 사회는 물론, 우리가 이주해 살아가는 미주 한인사회도 늙은이, 젊은이 모두가 물질만능이란 허상에 도취
되어 스스로를 기만하고 서있어야 할 자기 위치를 벗어나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이것이 우리 세대가 안고있는 고민거리가 되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잘 살아보겠다는 미혹(迷惑) 앞에서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도의까지 저버리고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좇아 해서는 안될 일을 주저없이 해대는 세태가 지금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고 있다.돈을 벌기 위해서는 누구와의 관계이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범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부도덕의 극치는 기독교인으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이 은밀하게 딸을 낳아놓고 자기 딸이 아니라고 버려버리는 엽기적이고도 비도덕적인 패륜 행위가 본국의 지도층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국민과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다.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월등하게 다른 것은 영적인 동물이기도 하지만 부모와 자식간에 이어지는 혈연의 질서가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을 심어주고, 자식은 늙은 부모를 공양하는 도덕성 함양이 가정과 우리 사회를 떠받들어 온 버팀목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누가 늙고 싶어 늙겠는가. 인간은 모두가 미래의 노인이다. 21세기의 세계 각국은 노인인구 증가 문제를 가지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노인들의 장수 문제가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정부주장에 노인들이 무슨 죄나 지은 사람들처럼 시름에 잠겨있다. 세계 여러나라 가운데서 유일하게 싱가폴 정부가 부모 부양을 골자로 한 효도법을 제정한 나라라고 한다.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소리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가르치는 효(孝)도 인륜지본(人倫之本)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친다. 노소장유천분질서(老少長幼天分秩序)의 뜻을 새겨보자. 어른과 아이를 기르는 일은 하늘의 질서라고 했다. 이 말뜻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연장자 우대의 말뜻이다. 오늘의 노인들에겐 물량적인 사회복지 혜택도 절실하지만 그보다는 어른을 존경하는 따뜻한 인정을 원한다.우리 민족이 지키며 살아온 가부장적 대가족제도가 옳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대가족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겐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전통윤리사상의 자랑도 있다. 그런 자랑스러운 가정의 윤리가 산업화와 핵가족 주위에서 무참히 짓밟혀 무너져내리고 있다. 자기 중심의 사회에선 용납될 수 있다는 기대 가치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가 핵가족 중심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더불어 공동체의 이익을 찾아 상부상조를 이루지 못하는 사회구조 하에서는 문제의 바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할 기독교마저 가정의 붕괴, 형제들이 겪는 절박한 문제에는 눈을 감으려고 한다. 사회의 그늘 속에서 빛을 잃고 사는 사람들의 구원처는 정부나 사회단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영혼 구원의 교회가 펼치는 사랑이 담긴 구제가 더 효과적임을 기독교는 알아야 한다.비판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공동체 안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먼저 손잡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힘있는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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