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Bad Day Good News

2005-11-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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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업(필라델피아)

지난 10월 첫째주, 우리 필라델피아 풋볼팀인 독수리 이글스가 패전의 절망 앞에서 경기 종료
몇분을 남긴 시점,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극적인 터치다운을 하여 역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다
음날 이곳 신문인 인콰이어러지에 1면 톱으로 큰 글자로 나온 기사 제목이다.

나는 이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너무나도 실감이 나고 기자의 번득이는 센스가 튀는 듯 하였다. 같은 상황을 알리는데 이렇게 적절하면서도 완벽하고 함축성 있게 역전의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였다. 이 기사 제목 를 되뇌이며 여러 날을 지냈다.회상하면, 우리 이민자들은 적진에 들어와 경기를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1세들은 더욱 더 힘든 경기들을 했다고 하겠다. 모든 것이 불리하고 관중들의 격려도 없고, 포지션도 없는 그야말로 긴장 속에서 승리 없이는 죽는다는 일념으로 종횡무진 전 경기를 맹렬히 뛰었다. 지금 이 시간과 이 찬스를 놓치면 영영 기회는 없을 것 같아 모든 세월에 던졌던 우리
들의 약동하였던 삶의 나날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경기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 했던 날, 나 자신이 그렇게 나약하고 무능해 보였던 날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이 혼자서 마음으로 새겨야만 했던 수많은 일들...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냉혹한 나의 실존의 여운 속에 그대로 주저앉은 듯 좌절의 쓴 잔을 마시기는 그 얼마였던가.녹초가 되어버린 육체에 실려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나의 정신을 다시 일깨웠던 날들,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었던 머리에서 울리는 사건과 음성들...

어느날 문득, 아득한 지평선으로 저무는 노을을 보며 나의 경기 동료, 무심했던 나의 이웃, 그리고 듣지는 못했더라도 격려를 보내느라고 목이 쉬도록 고함을 쳤던 미지의 관중들이 떠오른다. 한편 생각하면 우리 인생의 경기에도 태클과 무서운 저항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러한 스
릴이 없고 무난히 뛰는 경기가 있다면 그 경기는 참으로 싱거울 것은 물론이려니와 관중의 환호도 없을 것이다.자기의 삶의 터전에서 다가오는 많은 어려운 일들을 애정으로 받아들여 직장을 사랑했고, 동료를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안았고, 무거운 짐은 나누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이 적진에서의 경기가 감격적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남아있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유리한 경기로 만들 수 있는 찬스는 얼마든지 있지 않나 한다. 우리가 성심 성의를 다해 쌓아올린 노력의 그 바탕 위에서 만들어지는 Good News의 기회.지난 여름 내내 있었던 야구는 월드시리즈를 정점으로 막을 내셨다. 9회 말, 2아웃, 풀카운트에서 3점 홈런을 날려 경기를 반전시키는 무명의 선수를 보며 꼭 4번 타자만 홈런치라는 법은 없음을 본다.

또한 대학과 프로풋볼 경기가 한참인 이 시즌에 어쩌다 인터셉트 한 볼을 안고 죽을힘을 다해 적진으로 뛰고 있는 선수의 표정에 나도 가슴이 뛰며 흥분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그 집요하고 끈질긴 찬스의 기다림, 때가 오면 번개와도 같은 동작은 오로지 성공해야 한다는 그들의 의지가 만든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겠는가.이 긴 가을밤,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며 잠시라도 책을 읽고 나를 뒤돌아 볼 여백을 만들고 싶다. 뒤로 걷기를 하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전경들을 바라보며 앞만 보고 달리던 때와는 또 다른 경지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 이 시간이 있기까지 나를 격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웠을 때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고마운 벗들에게, 이웃들에게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많은 Bad Day Good News를 고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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