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다운 사람들

2005-11-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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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민(뉴욕풍물단)

뉴욕에서 공연활동을 시작한지 어느새 16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한국일보사로부터 코리안 퍼레이드의 선두에 설 농악대 상쇠(풍물단 지휘자, 당시는 모두 농악대라 했다)가 없어 걱정이라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열 댓명의 치배를 꾸려 나간게 지난 89년이었다.뉴욕을 무대로 조각가의 열정을 불태우던 내가 어쩌다 조금 배운 꽹과리 솜씨로 감히 상쇠 노
릇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겁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풍물 인생, 무심한 세월은 잘도 흘러 미국 내에서만 벌써 수백회가 넘는 공연을 기록하고 있으니 참으로 사람 팔자는 알다가도 모르겠다.올해의 첫 공연은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초청자는 뜻밖에 이 대학의 한국어 강사. 첫 통화에서 그녀는 이 도시에 한국의 사물놀이를 소개하고 싶다며 먼길을 와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우리의 의향을 살폈다. 에브루라는 흔치 않은 이름, 한인으로선 어딘지 다른 억양이 느껴졌지만 요즘 그런 한인 2세, 3세가 어디 한 둘인가.

펜실베니아의 3월은 서서히 물이 오르고 있었다. 싱그러운 들판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봄 내음에 취해 노래도 불러가며 우리 단원 일행은 여덟시간 만에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고장에 도착하였다. 숙소는 매리옷 호텔. 이런 고급 호텔을 잡아 주다니…. 에브루에게 고마운 생각이 절로 난다.
다음날 분주히 무대 뒤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웬 금발의 미인이 유창한 한국말로 “제가 에브루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마트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얼떨떨해 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말을 잇는다. “저는 터어키 사람입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성이 터커였음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가 성이 터커라는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2세 정도로만 생각한 터였다. 그러면서 일본인 남편을 소개한다. 남편의 이름은 에이지 스하라. 서울대에서 불교철학을 전공했다는 에이지 역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한국 유학중에 서로 만나 결혼했다며 두 사람은 공연에 불편함이 없도록 알뜰살뜰 우리를 보살펴 주었다. 그러니 공연은 더 잘 될 수 밖에 없다.


훼밀리 웍샵을 포함, 두 차례 공연을 마친 우리는 늘 그렇듯 신명나는 뒷풀이로 공연을 마무리 했다. 한바탕 춤을 함께 추고 나니 관객들은 흥에 겨워 이내 자리를 뜨지 못한다. 지금이 바로 스킨쉽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먼저 노인들과 어린이 관객들에게 다가가 악수도 청하고 포옹도 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그들은 피츠버그에 평생 살았지만 이렇게 신바람 나는 공연은 처음이라며 우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 중년의 미국여성은 자녀들과 함께 나란히 개량 한복을 입고 나와 우리를 감격케 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나는 에브루 부부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그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줄 공연비를 빼고도 돈이 조금 남는다며 구태여 우리를 한식집으로 끌고가는 것이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도대체 저 부부가 집에서는 어느 나라 말로 대화를 할까? 터어키어? 일본어? 아니면 영어? 뜻밖에 그들의 공통어는 한국어였다. 우리는 박장대소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한국어가 서로에게 가장 편한 언어란다. 남편 에이지는 한국어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들이 아주 다양해서 서로 다툴 때 좋기 때문이라며 우리를 웃긴다. 두 사람은 너무 다정해 보여서 아마도 그들에겐 한국어가 사랑을 나누기 좋은 말인가 보다고 나는 나름대로 해석하였다.계산을 마친 부부는 우리와 헤어지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정이 유난히 많은 에브루가 가다가 되돌아 와서는 우리 일행을 포옹하고 돌아서면 이번에는 남편이 돌아와 다시 부둥켜 안기를 몇차례, 참으로 요즘 보기 드문 정이 많은 젊은이들이었다. 그간 수많은 공연을 치르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는 에브루처럼 정이 많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녀의 한국말은 아름답게 들린다. 그리고 고운 말씨 속엔 정다움과 따스함이 배어있다. 생각해보니 그런 정다움이 느껴지는 한국말을 들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없다. 정이 많기로 소문난 우리 한국인이었는데….

한국인 특유의 정도 이제는 퇴색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내 삶이 메말랐던 것일까. 에브루는 내가 잊어버린 저편 기억의 편린을 일깨우고 있었다. 에브루는 터어키 국립 앙카라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원에서 한국어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피츠버그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최근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승진을 축하하며 아름다운 두 부부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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