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차르트 대령님의 은혜

2005-11-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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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커네티컷)

40여년 전, 내가 군대생활을 할 때 대한민국은 너무나 가난하여 군인이라기 보다는 거지요, 도둑놈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사는 깡보리 밥에 콩나물국 뿐이었고 동네 아줌마들이 부대에 들어와 김장하는 모습은 보았으나 그 김치는 장교들, 그리고 영외에 거주하는 하사관들
이 모두 훔쳐다 먹고 우리 사병들은 구경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대구에서 군대생활을 한 나는 제 502 장거리통신단 본부 행정과에 근무하면서 대구 시내로 외출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헌병들의 모습이 귀찮고 두려워서 늘 사복을 하고 역전에 있는 음악감상실을 출입하면서 클래식음악을 감상한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그 음악감상실은 무척 작고 좁아서 20명이 바짝 붙어 앉으면 꽉 차는 곳이었다. 그 당시 고전음악은 음악감상실에 가야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레코드가 귀하여 음악감상실은 늘 만원이었고 앉을 자리가 없을 때는 되돌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바로 옆좌석에 가까이 붙어앉은 중년남자가 희미한 불빛 아래 악보를 열심히 들여다 보면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은 모차르트의 바이얼린협주곡 제 5번이었고, 일명 ‘털키쉬(Turkish)”라고도 불리는 낭만의 요소를 듬뿍 갖추고 있어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곡이었다. 제 3악장은 1773년 그의 오페라 ‘루치오 씰라’에 나오는 발레음악을 발췌하여 만든 선율이 테마를 이루고 있으며 모호하기는 하나 18세기 당시 헝가리에 널리 알려진 민요 ‘털키쉬’에서 유래된 타이틀인 것이다. 협주곡이 끝나자 곧 퇴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느 고등학교 음악선생이려니 하는 추측을 하였다.


한주일쯤 지난 어느 토요일, 나는 사복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군복을 입고 음악감상실에 갔다. 전에 그 중년신사를 다시 보게된 나는 빈 좌석이 많았으나 그의 테이블 앞자리에 앉아 같이 모차르트를 감상하였다. 제3악장이 거의 끝날 무렵, 그는 나를 흘깃 바라보면서 나의 복장
을 보고 놀란 듯 하였다. 그러나 그의 눈인사와 엷은 미소는 나를 반기는 표정이었고 악보를 접으면서 나갈 준비를 하는 듯 일어서는 것이었다. 협주곡이 끝나면서 밖으로 나가는 그는 손짓으로 나를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무심코 그를 따라나간 후 “저녁
을 같이 하자”는 그의 권유를 따라 인근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친근해지면서 그 신사가 육군 대령의 신분으로 제 2군사령부 어느 부서의 참모로 있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 장거리통신단 단장과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이므로 무척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단장실 당번 하사관이 내가 근무하는 행정과에 들어와 단장님이 나를 부른다고 하였다. 선임하사를 비롯하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병들은 “저 놈이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단장님의 호출을 받았을까?” 하는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벌벌 떨면서 겁을 먹은채 단장실로 들어갔으나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단장님의 모습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나를 조카라고 소개하면서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을 한 그 대령은 그 후 내 외삼촌이 되어 주었으며 모차르트를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단장님의 깊은 배려를 받으면서 편안한 군대생활을 하였다.

모차르트 대령과는 이후로 가끔 음악감상실에서 만나 모차르트를 즐기면서 저녁도 같이 하곤 하였으나 육군본부로 전근한 후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고 나는 곧 제대를 하였던 것이다.태산과 같은 그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고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으면 반드시 이를 보답하여야 마음이 평안할 것을 믿으면서 나의 경험이 이를 교훈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모차르트 대령님, 지금은 어느 곳에 계신지요? 베푸신 은혜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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