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추 유감(晩秋 有感)

2005-11-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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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오 헨리의 역작 ‘마지막 잎새’.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고 버티던 그 잎새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 힘은 몸부림을 치면서 얼마 만큼이라도 움켜쥐고 있던 푸른색이었다. 갈색을 띠우며 잎새가 마르면 잎새를 붙들고 있던 가지는 여지없이 잎새의 손을 놓고 떨어뜨린다.

가을비가 차거워지는 가을이 되면, 나무의 뿌리는 나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수로(水路)의 문을 닫는다. 물이 차 있는 나무의 등줄기는 엄동설한에 얼음이 되어 꺾어지기 쉬운 까닭이다. 살기 위해서 스스로 휘어질 수 있는 공간을 내려고 물을 다 뺀 후 수문을 닫는다.살기 위해서 다들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산다. 어떻게 보면 지루하게 생겨먹은 생애를
그래도 살다보면 떨어지는 이문이라도 있을거라고 여기면서 해만 뜨면 하루라는 시간을 아니, 일년이라는 단위의 시간을 부지런히 주물럭거린다. 그러나 줏은 것 하나 없는 가을 어스름의 저녁이 되면 소주병을 비우는 사람이 많다. 발목 아래가 서늘해지는 이 가을에 그들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사정은 묻지 않고 그거 따스히 손을 잡아주고 싶다.


2,3주 가량 단풍이 늦어진다는 올해의 가을, 철새가 보이지 않는다. 철새에게 해마다 물어보는 미망의 안부도 올해는 늦어진다. 해마다 같은 길을 나르더라도 항상 새로운 표정으로 나르는 철새. 한동네에 붙박이로 사는 새에게는 새롭다던가 신통하다는 소리가 별반 없지만 철새에게는 언제나 신비롭다는 듯 ‘끼억 끼억’ 빈 하늘에다 들뜬 소리를 깔고 간다. 우리의 소리였다.눈빛이 떠다니고 흥분이 날라다니던 이민자들이 이 동네에 오래 살았는지 이제는 새롭다거나 신통하다는 소리가 없다. 아이들 학업의 뒷바라지도 다 끝났는지 떠다니는 눈빛도 없고, 돈도 많이 벌어놓았는지 날라다니던 흥분도 없다. 핏발 서도록 피곤한 눈을 붉히며 준비하던 그 길, 그 길을 따라 아이들이 따라오고 새로 온 이웃이 따라오지 않았던가!

가까이 다가오는 서슬퍼런 겨울을 두렵게 바라보면서 가을은 깊어가고 가랑잎은 자꾸만 떨어진다. 떨어진 가랑잎의 여윈 얼굴을 본다. 바람에 밀려가면서도 어디를 가나 찾아다니는 눈빛이다. 여윈 빛, 버리고 싶지 않았던 몇 조각의 퇴색한 푸른 빛을 들고 밀려가면서도 새 길을 찾아나서는 눈빛이다.우리는 이제 끝에 와 있는가? 아니, 가고 싶어 했던 목적지에 다 왔는가? 시간과 구름 가는 길을 빼놓고 보면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하여 간다. 끝을 향하여 가는 어떤 여정에는 처음에 세웠던 계획을 취소하고, 가던 길을 그만두거나 되돌아 가고 싶고, 어떤 사람은 여정의 끝이 거의 보이는데도 더 좀 가고 싶은 아쉬운 생각에 속도를 늦춘다. 어떤 부부는 부부로서 가던 길을 취소하고 뒤로 되돌아 가고 싶고, 어떤 부부는 황혼이 되어서도 앞으로 더 가고 싶은 연민에 손을 잡기도 한다.어려웠던 일이 추억이 되는 이민생활, 괴로웠던 일이 향수가 되는 인생살이, 일에 지친 핼쓱한 얼굴이나 괴로움에 시달린 까칠한 얼굴에 번지는 가느다란 미소가 아까부터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사람의 호탕한 웃음 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이런 사람은 끝 지점에 서 있어도 더 가고 싶어 한다.

아직은 우리에게서 수지타산을 내세울 수는 없다.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비 없이 저축한 이민이었지만 그 결과의 윤기를 수지타산이라는 명목으로는 꺼내보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더 가고 싶어하는 사람, 그래서 근거리의 스냅을 찍는 카메라나 먼 거리를 겨냥하는 망원경은 눈을 감지 않고 항상 긴장하면서 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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