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인간은 누구나…

2005-10-2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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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바람이 차가와지면서 낙엽의 난무가 아스팔트 위를 화려하게 누비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늪 속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고 있고 뉴올리언스 카트리나 수해에 미 동부지역은 홍수까지 참으로 인재에 천연재해까지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다. 아무리 세계가 복잡하고 예측 불허의 일들이 펑펑 터져나도 아침이면 일어나 움직이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 우리의 오감(五感)을 만족시켜가며 지나가는 일상은 반복되고 올 한해도 다 가고 있다.

핼로원이 지나자마자 땡스기빙과 크리마스가 연말연시를 화사하게 치장할 것이다. 연말을 앞두고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공지영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한 살인에 대한 이야기다. 책 제목을 보고 좀
더 행복해지고싶어 샀던 책인데 첫장을 펼치고는 ‘아이쿠 책을 잘못 골랐네’ 했었다.사람들은 대부분 어둡고 칙칙하고 구차한 것은 피해가고 싶고 불행 속에 찌든 사람을 만나길 기피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가며 점점 저절로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낄 것이다.아버지의 폭행으로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눈이 먼 동생은 길거리에서 죽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다 종내 사형수가 된 윤수, 어릴 적 상처받은 기억이 일생을 묶어 자살기도를 세 번이나 했던 유정,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떡을 해가지온 삼양동 할머니, 사십년동안 버스 타고 다니며 구치소의 사형수를 면회 다니는 모니카 수녀 등 이지러지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등장하지만 진정으로 참회하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두운 곳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오랜기간 살인에 관계된 사람을 만나고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기록을 읽었다고 한다. 나 역시 젊었을 때 대통령상을 받은 수녀님 인터뷰를 위해 영등포 구치소의 높다란 담을 넘어 갇힌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죄수들 중 품행이 방정했던 반장격인 한 십대의 뒷모습을 모델 삼아 수녀님과 얘기하는 모습을 사진촬영하기도 했다. 그때 그들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저 내 일을 하러 왔을 뿐이었다. 다만 수백명의 수인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무대에 서서 성가를 부르는 위문단 십여명 중 몇 명의 옷차림과 액세서리가 지나치게 화려
하고 향수 냄새가 심했던 것이 다소 신경에 거슬렸었다.왜 그곳에 갇혀 살아야 할지 그들 처지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거나 우리에겐 ‘지나가는 헛된 삼십분이 그들에겐 이 세상 마지막이 될 30분‘이라는 것은 짐작조차 못했다.지금와서 그것이 얼마나 큰 만용이고 오만이었는지 부끄럽기 그지없다. 작가는 소설 말미에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고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요즘들어 더욱 공감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다못해 내일 모레 스러져갈 황혼기의 노인이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환자나 사형선고를 받은 미결수나 살아있는 한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황당무계할 지라도 새로운 꿈을 꾸려한다는 것이다.얼마전 LA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해외국가 수형시설에 수감된 한국 국적자 437명 중 47.6%인 208명이 미국내 수형시설에 수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한인의 수감 사유는 살인과 강도가 가장 많다고 한다.

미국 감옥에 갇힌 한인들, 그들에게도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명절은 올 것이다. 그런 날일수록 더욱 따뜻한 정이 그리울 것이다. 또 어릴 때 먹던 한국음식이 얼마나 먹고싶을 것인가. 다행히 구치소를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훌륭한 분이 소수나마 한인사회에는 있다. 이번 겨울에는 그분들에게 힘을 좀 실어주자.잘 먹고 잘 사는 주위사람들에게 이번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은 생략하고 우리 작은 정성을 모아 뜨끈뜨끈한 백설기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갈비구이와 잡채 등을 한보따리 싸갖고가 그들에게 한바탕 잔치를 열어주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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