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헌 옷

2005-10-24 (월)
크게 작게
박치우(복식가)

“Trust not the heart of that man for whom old clothes are not venerable” 우리말로 “헌옷을 싫어하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라고 해야할지, 독자가 더 좋은 영문 독해력으로 이해하도록 원문을 실었다. 이것은 스코트랜드 출신 영국의 저술가 토마스 카어라일(Thomas Carlyle)이 한 말이다.

지난번에도 이 칼럼에 썼듯이 윈저 듀크가 새 옷을 벽에 던져 헌옷처럼 보이게 해서 입었다는 이야기가 이 말을 잘 뒷받침 한다.
검소하고 성실한, 나대지 않는 사려깊은 겸양의 표시를 위해 헌 옷을, 그리고 새 옷도 헌것처럼 보이게 입는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도 못한 사람이 헌 옷을 입는다고 헌 옷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개화사조 흐름은 서구적인 새 문화를 받아들이는 정신생활로 변하면서 더우기 산업시대를 맞아 여유있어 지면서 우리의 의식주는 완전히 서구화 되었다고 보여진
다. 그런데 그 서구화 된 것에 의심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양새만 그런지 속 알맹이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점이다. 대체로 의식주의 문화는 새것에 가치관을 둔 것 같다. 그래서 새것에 생활 경쟁이 붙었다. 새 옷, 새 음식, 새 집, 모두 새 것이다. 그래서 모두 나대고 있는 느낌
이다.


실은 사람도 오래 사귀어 지낸 사람이 편한 것처럼, 입던 옷이 편하고 먹어본 음식도 맛이 있다 그리고 집도 살던 곳을 떠나기 싫어한다. 그것이 사람의 본심인 것 같다. 우리가 그 본심으로 돌아갈 때 참도 그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헌 것을 아끼고 새것도 헌 것처럼 보이게 하고싶은 마음이 생기나 보다. 그러고 보면 사람 됨됨을 보려면 옷차림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는 얘기는 그리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자고로 문제가 된 옷차림은 보통사람들 보다 큰 인물의 옷차림이 화제가 되었었다. 그것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나라의 선량들 그리고 대통령이 입고 있는 옷도 유심히 뜯어보아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 세일즈맨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를 스스로 PR 하는 것이 현대인의 사조인양, 옷차림도 그런 목적으로 변했다. 국민을 잘 살게 해 주겠다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의 의식주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몇 년 전 해외토픽은 중국의 등소평 재임시 정상회담을 앞두고 자기의 튿어진 외투를 손수 꿰매고 있는 사진을 전세계에 전송했다. 또 그가 퇴임 후에 그가 살던 집을 찾아 보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근처 살던 사람들도 그의 집을 몰랐다는 얘기를 우리 모두 읽은 적이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다는 만고의 진리를 놓고, 지금의 현실을 보면 지난 그때도 알 수 있
다.

우리는 건국을 했었어도 아주 배고팠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을 해결책으로 국시 제일로 하여 우리의 배고픔을 면하게 하였던 그 분이 불행한 변으로 사망했을 때 녹슬은 장식의 혁띠를 매고 있었다는데 그 분이야말로 헌 옷을 아껴입었던 분 같다. 그런데 그것도 잘못됐다는 사람들
이 꽤나 있으니, 어느 불교 종파가 말하는 말법(末法) 시대에 깊이 들어선 느낌이다. 말법시대란 정법, 즉 바른 법이 은몰하여 중생들이 혼미, 바른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사악한 자들이 북새를 떠는 탁악세가 만년으로 이어지는 시대라고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과연
그런 세상으로 다 하게 될려는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